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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먹서먹 하였다.
자전거탄풍경


익숙한 풍경을 뒤로 하고 자전거의 방향을 산으로 돌렸다. 계절은 이미 성급한 여름기운이 죽자고 덤비는 날이어서 짧은 시간 달렸지만 이내 등에 땀이 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을 오르는데 버스 정류장 근처 난장 한 귀퉁이에 눈길을 끄는 풍경이 있었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이 수레에 쌓여있는 폐지를 한장 한장 들추어서는 종이 위에다 페트병의 물을 슬쩍슬쩍 붓고 있었다. 한장 한장 꼼꼼하게. 


나는 어쩌자고 이런 숨찬 순간에 흘려버려도 될 민망한 상황이 자주 동공에 포착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되도록 거짓없는 모국어로 표현하자면.


[노인은 폐지를 한장 들어올리고 그 위에 페트병의 물을 찌끄리고 다시 그 밑에 폐지를 들어올려 다시 그 위에다 물을 찌그리고 있었다.]


그렇지... 찌끄리고 있다는 문장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탄 내 어깨가 그 노인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영악한 나의 뇌는 그 노인의 형편을 재빠르게 훑고 있었다. 폐지는 무게에 따라 돈으로 바뀌어지는 형편이어서 그 사이 사이로 물을 먹여 무게를 늘이고 있는 거겠지. 혼자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래서인지 노인의 얼굴은 일이 사람에게 은밀히 던져주는 웃음이 없었다. 


입바른 소리로 뭐라 타박하거나 값싼 이해를 구할 수도 없는 날것 그대로인 도회의 삶이었다. 노인과 내가 이해당사자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에 내가 그 폐지를 매입하여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폐지가 품고 있는 수분은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나? 물은 생명과도 같은데 어느 시공간에 처하였느냐에 따라 거세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이 그런데 하물며 사람의 삶은 어느 지경까지 누추해질 수 있을지. 


뇌속이 복잡하였다.


오랜만에 자전거로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데 일체의 풍경이 서먹서먹하였다.









오, 제주.
자전거탄풍경


오, 제주.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내렸을 때 나는 늘 그랬듯이 오, 제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어? 제주... 하다가 그래, 제주! 하고는 종국엔 음... 제주...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허겁지겁 제주를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배 안에서 섬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제주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정말 제주에서 딱 한달만 살면 그리움이 사라질까.


섬에 내리면 곧장 천백도로를 횡단하고 내처 중산간의 모세혈관과도 흡사한 좁은 길을 떠돌아다녀야지 했던 초심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는 익숙한 그 예전의 길을 답습하고야 말았다.


입으로 이정표의 지명을 씨부렁거려보면 괜히 정겹고도 흥이나는 애월애월 한림한림 모슬모슬 난드르난드르, 를 달리다가 예의 자전거를 탄 동행을 만나 같은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엇비슷한 스토리의 사연을 축적하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한결같기도 힘든 일이지만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한결같기가 힘든 일이었다. 제주는 늘 그랬듯이 그냥 그대로의 제주였을 뿐이었는데 다시 찾은 나는 그 예전의 내가 아니었던 거였다. 나는 무슨 의무라도 있는 사람인 것마냥 길에서 만난 인연들을 꽁꽁 용을 쓰며 한사람도 흘려버리지 않고 챙기고는 우도까지 바래다 주고 성산에서 오렌지호를 홀로 탔다. 


때는 수학여행 시즌이어서 그 큰 배가 예약으로 빈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제주가 알면 섭섭할 일이지만 막상 자리가 없다고 하니 왜 또 그렇게 빨리 벗어나고 싶던지... 대기순번을 받고 기다리니 다행히(?) 빈자리가 났다고 매표소 직원이 표를 주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배에 올라 출렁이는 자리에 앉았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이어서 자전거여행은 지속될 수 없었다. 둘러대기 좋은 핑계도 있었던 셈이다.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었는데, 막상 배가 섬에서 멀어지자 나는 어쩌자고 저 섬이 다시 그리워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우니 언젠가 또 갈거다.


섬이 희미해질 때였다. 힘든 길을 완주한 서로를 대견해하며 성산의 돼지고기집에서 같이 소주잔을 기울였던 어린 여자애의 독백이 떠올랐다.


- 아저씨... 이마가 뜨끈뜨끈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요.


제주는 처음 찾은 이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녀는 끝내 눈물 지었다.


다행히 나는 처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