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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자전거탄풍경

목포는 나에게 제주로 가는 경유지였다. 처음엔 단순히 경유지였으나 목포에게서 받은 인상은 오히려 제주 이상으로 좋았다. 마치 메인매뉴보다는 주변에 딸려 나온 곁다리 반찬에 더 입맛이 당겨 젓가락질이 잦아진 경우처럼 자전거를 타고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맛이 몹시 좋았다.


목포는 초행길이었다.


부산에서 왔다,하니 중년의 공무원은 가던 길도 되돌려서 찾아헤매던 숙소의 문앞까지 나를 안내해주었다. 시내 한가운데에 이런 멋스러운 숙소가 자리잡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례 한적한 외곽에 있겠거니 주변만 빙빙 돌았던 거였다. 요령 없기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어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으나, 덕분에 남도사람의 따뜻한 정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크게 손해 본 일은 아니었다.



여그가 서울로 치자면 명동인 택이제, 하고 공무원이 말했다. 자기 고향에 자부심이 없다면 토박이라 하겠나. 정돈된 시가지 사이로 오후의 적당히 예열된 햇볕이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명동보다 여가 더 낫네예, 했더니 타이 없는 흰색 셔츠의 공무원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웃었다. 


목포의 미소였다.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아침 배편 예약을 마쳐도 시간은 많았다. 목포항 관광안내소 부스에서 지도 한장을 얻어 눈길을 끄는 곳을 찾았다. 목포엔 대한제국 때의 일본영사관과 일제강점기 때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남아 있었다. 당시 목포의 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면서도 괜히 시간의 흐름이 더디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요즘은 자전거로 다니는 삶의 속도와 주변을 바라보는 눈높이에 대해 몹시 만족하며 살아간다. 내가 자동차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목포를 경유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또 이날의 목포는 내 생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에 맞는 속도와 눈높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이 힘이 들 뿐.



아름다운 건물이 보였다.


칼 찬 그들은 바다를 막아 반듯하고도 넓직한 길을 내고 길의 시작점에 그들의 영사관을 지었다. 그 앞마당을 기점으로 국도 1호와 2호가 시작되는 도로원표가 우뚝 서있다. 국도 1호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2호는 목포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영사관의 칼 찬 주인들이 빨간벽돌 건물 안에서 신의주와 부산을 꿈꾸었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였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939키로미터... 


아득하였다.



나즈막하고 고만고만한 가옥들 사이에 유난히 우뚝한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었다. 휴관일이라 건물 내부로 들어가 보지 못해서 섭섭하였다. 당시 8곳에 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소작료를 가장 많이 거둬들인 지점이라고 하니 건물의 규모가 저절로 수긍이 갔다. 


건물은 곳곳에 일본을 상징하는 문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랐다.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작은 문은 열려 있고 빨간 벽돌 건물 너머로 새털 같은 구름이 목포의 오후를 꾸며주고 있었다. 영사관 건물 주변을 한바퀴 휘익 둘러본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케노피 아래 그늘에서 혼자 놀았다. 담배를 끊었는데 이런 순간처럼 혼자 놀기 몹시 심심할 때면 담배맛을 다시 느낄 수 있었으면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담배연기를 이제 몸이 기억하지 못하니 심심함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벌떡 일어나 멀리 그들이 닦아놓은 영사관 앞 본정통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새로 도청이 들어서면서 항구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은 경기가 말이 아니란다. 목포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이 좀 더 빠르게 시간이 흘렀으면, 하고 바란다는 풍문이었다.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이 지독한 더딤,정체가 좋았다. 


내 모습과 흡사하여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