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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고지를 넘어
자전거탄풍경



봄에 오르려 하다 그만 둔 길을 다시 나섰다. 항구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지방도 1139 이른바 1100도로위에 자전거를 올리고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다. 11월 늦가을 한라산 가는 길의 날씨는 오르막에선 땀을 쏟게 하더니 길의 끝에 마침내 당도하자 손끝을 얼릴 기세였다.


날이 내내 흐리다가 여행자가 길의 정점에 당도하니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스스로의 본모습을  설핏 열어주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싶어서 상고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차갑게 얼어버린 편의점 김밥을 급하게 먹었다. 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래 걸을 수 없는 몸이다. 해서 둥근 형태를 띈 발, 자전거의 신세를 아니질 수 없는데 자전거는 좁고도 긴 돌밭을 관통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았다.


불러도 불러도 질리지 않는 그 이름 산록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한라산의 상고대가 떠올라 못내 아쉬웠다. 11월은 아직 반나마 남았고 두발이 건강한 이는 가을이 먼길을 떠나기 전에 한라산을 오를 일이다.





중산간의 길을 달리다 보면 해안도로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이 해안도로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산록도로를 따라 다녀볼 것을 권한다. 접근은 힘들지만 일단 높은 곳에 자전거를 올려놓으면 시간도 단축되고 여차하면 원하는 지점으로 곧장 내려쏠 수 있어서 마음이 쫒기지 않아서 좋다.


오전과는 달리 점심을 지나자 하늘은 가을의 전형이었고 갈대와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선선한 바람의 도움에 힘입어 자전거여행자는 첫날 제주의 서부와 남부건너뛰어 산록도로를 따라 성산포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힘들고 긴 길의 끝자락 성산의 숙소 근처 고깃집에서 근래 가장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먹는 요령을 몰라 늘 태워서 먹던 돼지고기를 이제 몇번 경험이 쌓였다고 알맞게 익은 상태에서 낼름낼름 입으로 가져갔다. 한라산 소주 한잔을 들이켜고 감격에 젖어 있으니 근육과 관절에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통증이 스쳐지나간다.


제주가 좋았다.









다음날, 중산간 위주의 여행을 계획했으나 그래도 싶어서 들른 우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물론 여기저기 폭탄이 떨어지고 파편이 튄듯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어 을씨년스럽기도 하였으나 섬이 지닌 풍경의 기본이 워낙 독보적이다보니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부디, 하는 마음을 섬에 남겨두고 여행자는 다시 산길로 곧장 자전거를 몰았다.



용눈이 오름에서 뭉기적거리는 바람에 다랑쉬 오름 입구에 도착하자 해는 이미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 네다섯시만 되어도 중산간의 날은 빠르게 어두워진다. 다랑쉬 오름은 다음으로 미루고 맛보기 삼아 오른 아끈다랑쉬 오름에서 나는 주체 못할 황홀에 빠져들었다.


억새와 바람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산 영혼이 제멋대로 뒤섞여 한바탕 군무를 펼치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이제 자전거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