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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엔딩... 경주.
자전거탄풍경

원인도 모르는 근육통과 현기증에 삼일을 앓고 있었더니 봄날의 벚꽃이 더욱 간절하였다. 바람에 실려 문틈으로 들어온 꽃잎을 보고 있자니 조바심이 더해져 없던 마음의 병까지 나고야 말았다.


저 꽃을 보아야 하는데…… 다 지기 전에 보아야 하는데…….


성도 나고 집중이 안되니 나는 미친사람마냥 두뺨을 양손으로 후려 갈겨보기도 하고 근육통으로 온전치 못한 육신의 여기저기를 주먹으로 두들겨보기도 하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팔짝팔짝 뛰기에 이르렀다.


떨어져라! 떨어져! 귀신같이 들러붙어 있는 통증아 사라져라!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병증이 조금 호전의 기미가 보이자 나는 부리나케 짐을 싸서 자전거에 올랐다. 가까운 곳의 꽃은 이미 감흥을 잃은지 오래고 조금이라도 북으로 가면 나을 것 같아 정처로 삼은 곳은 경주.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곳에서 익명성이 선물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어슬렁거렸다. 그것도 잠시, 골목 한구석에도 대릉원 긴담 너머 어느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도 그리고 박물관 마당 큰종 옆에도 10년전 20년전 30년전의 내가 오늘의 나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 모든 나날들에 하나하나 눈인사를 하고 나니 한바탕 거친바람이 꽃나무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아, 꽃잎들이 폭설처럼 사선으로 떨어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나의 추억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꽃잎들의 행방을 열심히 좇았으나 얼마 못가 지치곤 하였다. 호된 봄날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1100고지를 넘어
자전거탄풍경



봄에 오르려 하다 그만 둔 길을 다시 나섰다. 항구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지방도 1139 이른바 1100도로위에 자전거를 올리고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다. 11월 늦가을 한라산 가는 길의 날씨는 오르막에선 땀을 쏟게 하더니 길의 끝에 마침내 당도하자 손끝을 얼릴 기세였다.


날이 내내 흐리다가 여행자가 길의 정점에 당도하니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스스로의 본모습을  설핏 열어주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싶어서 상고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차갑게 얼어버린 편의점 김밥을 급하게 먹었다. 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래 걸을 수 없는 몸이다. 해서 둥근 형태를 띈 발, 자전거의 신세를 아니질 수 없는데 자전거는 좁고도 긴 돌밭을 관통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았다.


불러도 불러도 질리지 않는 그 이름 산록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한라산의 상고대가 떠올라 못내 아쉬웠다. 11월은 아직 반나마 남았고 두발이 건강한 이는 가을이 먼길을 떠나기 전에 한라산을 오를 일이다.





중산간의 길을 달리다 보면 해안도로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이 해안도로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산록도로를 따라 다녀볼 것을 권한다. 접근은 힘들지만 일단 높은 곳에 자전거를 올려놓으면 시간도 단축되고 여차하면 원하는 지점으로 곧장 내려쏠 수 있어서 마음이 쫒기지 않아서 좋다.


오전과는 달리 점심을 지나자 하늘은 가을의 전형이었고 갈대와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선선한 바람의 도움에 힘입어 자전거여행자는 첫날 제주의 서부와 남부건너뛰어 산록도로를 따라 성산포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힘들고 긴 길의 끝자락 성산의 숙소 근처 고깃집에서 근래 가장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먹는 요령을 몰라 늘 태워서 먹던 돼지고기를 이제 몇번 경험이 쌓였다고 알맞게 익은 상태에서 낼름낼름 입으로 가져갔다. 한라산 소주 한잔을 들이켜고 감격에 젖어 있으니 근육과 관절에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통증이 스쳐지나간다.


제주가 좋았다.









다음날, 중산간 위주의 여행을 계획했으나 그래도 싶어서 들른 우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물론 여기저기 폭탄이 떨어지고 파편이 튄듯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어 을씨년스럽기도 하였으나 섬이 지닌 풍경의 기본이 워낙 독보적이다보니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부디, 하는 마음을 섬에 남겨두고 여행자는 다시 산길로 곧장 자전거를 몰았다.



용눈이 오름에서 뭉기적거리는 바람에 다랑쉬 오름 입구에 도착하자 해는 이미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 네다섯시만 되어도 중산간의 날은 빠르게 어두워진다. 다랑쉬 오름은 다음으로 미루고 맛보기 삼아 오른 아끈다랑쉬 오름에서 나는 주체 못할 황홀에 빠져들었다.


억새와 바람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산 영혼이 제멋대로 뒤섞여 한바탕 군무를 펼치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이제 자전거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일상다반사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타려고 커피포트의 전원을 올리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먹통이 되어버리는 거였다. 일진이 안좋은 날이겠거니 짧은 한숨을 한차례 내뱉은 그는 가스레인지로 손길을 옮겼다. 작은 주전자를 올리고 불꽃을 댕기려 레버를 돌리는데 날카로운 기계음만 날 뿐 가스레인지 조차 반응이 없었다. 


불꽃을 일으켜주는 작은 부속이 이물질로 오염되어 있어서 더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였다. 


- 하긴…… 두놈 다 햇수로 8년이 지났으니 문제가 생길만도 하지.


빈속에 타먹는 인스턴트 아침 커피를 거르니 괜히 성질이 나는 그였다. 세월에 굴복한 하찮고도 허섭한 세간살이들을 둘러보던 그는 문득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굽혀지지 않고 쉬이 피로해지며 피가 통하지 않는지 자주 경련이 일어나는 그의 오른발이 영판 오늘의 세간살이를 닮은 거 같아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괜히 속으로 찔끔거려보는 그였다.


이틀 전의 일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단골 통닭집에 들른 그는 한참 닭 튀기기에 바쁜 여사장의 간을 보았더랬다.


- 저기, 사장님. 제가 쿠폰이 열장 모였거든요. 가지고 오면 맥주 한 병 주실 수 있나요?


- 무슨! 열장이면 닭은 공짜고 술값만 계산하면 돼.


오! 예……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에도 이런 수준의 요령밖에 부릴줄 모르는 그는 천상 낯선 곳에선 밥 못얻어먹을 성품의 소유자였다. 빈속을 쓰리게 하는 아침 인스턴트 커피를 못끓여 먹은 탓에 괜히 허전하고 불안해서 한쪽 다리를 덜덜 떨던 그가 전화기를 냅다 들었다. 전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그는 호기롭게 외쳤다.


- 상오, 닭한마리값이 생겼으니 저녁에 봅시다. 늘 먹던, 옆 가게 커피값은 당신이 들고오시오.


세월이 지나 몸에 기능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옆에 있는 친구가 이제 끝까지 갈 친구지. 그 친구를 살뜰히 챙겨야겠다고 괜히 용을 쓰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 거였다.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목포는...
자전거탄풍경

목포는 나에게 제주로 가는 경유지였다. 처음엔 단순히 경유지였으나 목포에게서 받은 인상은 오히려 제주 이상으로 좋았다. 마치 메인매뉴보다는 주변에 딸려 나온 곁다리 반찬에 더 입맛이 당겨 젓가락질이 잦아진 경우처럼 자전거를 타고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맛이 몹시 좋았다.


목포는 초행길이었다.


부산에서 왔다,하니 중년의 공무원은 가던 길도 되돌려서 찾아헤매던 숙소의 문앞까지 나를 안내해주었다. 시내 한가운데에 이런 멋스러운 숙소가 자리잡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례 한적한 외곽에 있겠거니 주변만 빙빙 돌았던 거였다. 요령 없기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어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으나, 덕분에 남도사람의 따뜻한 정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크게 손해 본 일은 아니었다.



여그가 서울로 치자면 명동인 택이제, 하고 공무원이 말했다. 자기 고향에 자부심이 없다면 토박이라 하겠나. 정돈된 시가지 사이로 오후의 적당히 예열된 햇볕이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명동보다 여가 더 낫네예, 했더니 타이 없는 흰색 셔츠의 공무원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웃었다. 


목포의 미소였다.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아침 배편 예약을 마쳐도 시간은 많았다. 목포항 관광안내소 부스에서 지도 한장을 얻어 눈길을 끄는 곳을 찾았다. 목포엔 대한제국 때의 일본영사관과 일제강점기 때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남아 있었다. 당시 목포의 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면서도 괜히 시간의 흐름이 더디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요즘은 자전거로 다니는 삶의 속도와 주변을 바라보는 눈높이에 대해 몹시 만족하며 살아간다. 내가 자동차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목포를 경유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또 이날의 목포는 내 생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에 맞는 속도와 눈높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이 힘이 들 뿐.



아름다운 건물이 보였다.


칼 찬 그들은 바다를 막아 반듯하고도 넓직한 길을 내고 길의 시작점에 그들의 영사관을 지었다. 그 앞마당을 기점으로 국도 1호와 2호가 시작되는 도로원표가 우뚝 서있다. 국도 1호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2호는 목포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영사관의 칼 찬 주인들이 빨간벽돌 건물 안에서 신의주와 부산을 꿈꾸었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였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939키로미터... 


아득하였다.



나즈막하고 고만고만한 가옥들 사이에 유난히 우뚝한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었다. 휴관일이라 건물 내부로 들어가 보지 못해서 섭섭하였다. 당시 8곳에 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소작료를 가장 많이 거둬들인 지점이라고 하니 건물의 규모가 저절로 수긍이 갔다. 


건물은 곳곳에 일본을 상징하는 문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랐다.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작은 문은 열려 있고 빨간 벽돌 건물 너머로 새털 같은 구름이 목포의 오후를 꾸며주고 있었다. 영사관 건물 주변을 한바퀴 휘익 둘러본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케노피 아래 그늘에서 혼자 놀았다. 담배를 끊었는데 이런 순간처럼 혼자 놀기 몹시 심심할 때면 담배맛을 다시 느낄 수 있었으면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담배연기를 이제 몸이 기억하지 못하니 심심함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벌떡 일어나 멀리 그들이 닦아놓은 영사관 앞 본정통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새로 도청이 들어서면서 항구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은 경기가 말이 아니란다. 목포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이 좀 더 빠르게 시간이 흘렀으면, 하고 바란다는 풍문이었다.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이 지독한 더딤,정체가 좋았다. 


내 모습과 흡사하여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서먹서먹 하였다.
자전거탄풍경


익숙한 풍경을 뒤로 하고 자전거의 방향을 산으로 돌렸다. 계절은 이미 성급한 여름기운이 죽자고 덤비는 날이어서 짧은 시간 달렸지만 이내 등에 땀이 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을 오르는데 버스 정류장 근처 난장 한 귀퉁이에 눈길을 끄는 풍경이 있었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이 수레에 쌓여있는 폐지를 한장 한장 들추어서는 종이 위에다 페트병의 물을 슬쩍슬쩍 붓고 있었다. 한장 한장 꼼꼼하게. 


나는 어쩌자고 이런 숨찬 순간에 흘려버려도 될 민망한 상황이 자주 동공에 포착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되도록 거짓없는 모국어로 표현하자면.


[노인은 폐지를 한장 들어올리고 그 위에 페트병의 물을 찌끄리고 다시 그 밑에 폐지를 들어올려 다시 그 위에다 물을 찌그리고 있었다.]


그렇지... 찌끄리고 있다는 문장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탄 내 어깨가 그 노인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영악한 나의 뇌는 그 노인의 형편을 재빠르게 훑고 있었다. 폐지는 무게에 따라 돈으로 바뀌어지는 형편이어서 그 사이 사이로 물을 먹여 무게를 늘이고 있는 거겠지. 혼자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래서인지 노인의 얼굴은 일이 사람에게 은밀히 던져주는 웃음이 없었다. 


입바른 소리로 뭐라 타박하거나 값싼 이해를 구할 수도 없는 날것 그대로인 도회의 삶이었다. 노인과 내가 이해당사자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에 내가 그 폐지를 매입하여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폐지가 품고 있는 수분은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나? 물은 생명과도 같은데 어느 시공간에 처하였느냐에 따라 거세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이 그런데 하물며 사람의 삶은 어느 지경까지 누추해질 수 있을지. 


뇌속이 복잡하였다.


오랜만에 자전거로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데 일체의 풍경이 서먹서먹하였다.









오, 제주.
자전거탄풍경


오, 제주.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내렸을 때 나는 늘 그랬듯이 오, 제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어? 제주... 하다가 그래, 제주! 하고는 종국엔 음... 제주...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허겁지겁 제주를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배 안에서 섬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제주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정말 제주에서 딱 한달만 살면 그리움이 사라질까.


섬에 내리면 곧장 천백도로를 횡단하고 내처 중산간의 모세혈관과도 흡사한 좁은 길을 떠돌아다녀야지 했던 초심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는 익숙한 그 예전의 길을 답습하고야 말았다.


입으로 이정표의 지명을 씨부렁거려보면 괜히 정겹고도 흥이나는 애월애월 한림한림 모슬모슬 난드르난드르, 를 달리다가 예의 자전거를 탄 동행을 만나 같은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엇비슷한 스토리의 사연을 축적하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한결같기도 힘든 일이지만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한결같기가 힘든 일이었다. 제주는 늘 그랬듯이 그냥 그대로의 제주였을 뿐이었는데 다시 찾은 나는 그 예전의 내가 아니었던 거였다. 나는 무슨 의무라도 있는 사람인 것마냥 길에서 만난 인연들을 꽁꽁 용을 쓰며 한사람도 흘려버리지 않고 챙기고는 우도까지 바래다 주고 성산에서 오렌지호를 홀로 탔다. 


때는 수학여행 시즌이어서 그 큰 배가 예약으로 빈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제주가 알면 섭섭할 일이지만 막상 자리가 없다고 하니 왜 또 그렇게 빨리 벗어나고 싶던지... 대기순번을 받고 기다리니 다행히(?) 빈자리가 났다고 매표소 직원이 표를 주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배에 올라 출렁이는 자리에 앉았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이어서 자전거여행은 지속될 수 없었다. 둘러대기 좋은 핑계도 있었던 셈이다.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었는데, 막상 배가 섬에서 멀어지자 나는 어쩌자고 저 섬이 다시 그리워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우니 언젠가 또 갈거다.


섬이 희미해질 때였다. 힘든 길을 완주한 서로를 대견해하며 성산의 돼지고기집에서 같이 소주잔을 기울였던 어린 여자애의 독백이 떠올랐다.


- 아저씨... 이마가 뜨끈뜨끈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요.


제주는 처음 찾은 이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녀는 끝내 눈물 지었다.


다행히 나는 처음이 아니었다.























길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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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숙소에서 이른바 여행전문가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살고 싶은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련의 행위라고 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라? 나랑 같네.


길따라 가다보니 강이 나왔다. 숨죽이며 고요한 강, 먼지 풀풀 날리던 강, 은밀하게 표정을 감추고는 나를 훔쳐보던 강, 여러가지 강의 표정과 맞닥뜨렸지만 왠지 풍경은 마음으로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다. 끝없이 하게 되는 질문.


나는 저 강어귀 어느 한적한 곳에서 홀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까?


풍경은 죄가 없는데 나는 선뜻 강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한없이 고요한 강의 구비구비마다 불가해한 인내심의 소유자들이 오래 전 그날부터 살아오고 있었다. 나로선 엄두가 안나는데, 하다가도 다시 용기를 가져본다. 


하긴 장소 따위가 대수던가. 내가 그곳을 받아들이고 녹아들어갈 마음이 안생기는 상태면 아무리 좋다는 곳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겹지만 필시 이것도 운명이었다.















꽃소식
일상다반사

지금 이곳은 꽃이 제색깔을 찾아가느라 바쁘기가 말도 못해요. 


그곳은 여기보다 더하겠지요? 


작년에 그곳에서 보았던 동백꽃이 그리워 목이 쉴 지경입니다.


동백이건 벚꽃이건 조만간 다시 찾을 터이니 쉬어빠지지 말고 남아있으라 전해주세요.






입춘대길, 건양다경...
일상다반사


입춘대길, 건양다경(建陽多慶)...


동네 골목에 복을 비는 듯한, 아니면 액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이기도 한 듯한 기원이, 주술이 을씨년스럽게 내팽겨쳐져 있었다. 쌍으로 만든 모습이 다정하면서도 누운 자리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어서 괜히 처연해보였다.


건양다경... 봄의 따스한 기운이 감도니 경사로운 일이 많으리라.


아마도 사람만이 봄의 따스한 기운 정도만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유일한 포유류겠지. 나또한 그렇다. 갈대를 줒어 집으로 갔다. 지금은 먼 대륙에서 흘러온 흙먼지 냄새가 가득한 도회의 밤. 하늘은 비를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몰래 갈대로 인형을 만들고 있다.


기원과 주술이 손끝에서 간당거리고 있는 밤이다.

 


해피투게더, 야간매점
일상다반사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있다. 개그맨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통상의 영미권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처음 사용한 사람은 개그맨 전유성이다. 코미디언이라는 말과 구분할 목적으로 그가 찾아낸 말이니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다. 우리나라의 방송환경에서 희극배우를 뜻하는 코미디언이라고 부르기에도 딱히 적당하지 않고 MC, 진행자라고 부르기에도 썩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방송을 통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연예인을 칭하는 데에는 개그맨 만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이십대 시절에 한 개그맨 지망생과 인연이 닿았던 적이 있다. 개그맨도 아니고 그저 개그맨 지망생이었는데도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 그 재주가 너무 신기하고 부러웠었다. 그는 사람을 웃기는 것에도 시간을 정해 놓고 주변 사람들을 포복절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뜨고 마는데, 사람들은 그가 떠나는 것을 너무나 아쉬워하기 십상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다가 등돌리고 떠나는 개그 지망생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슨 마법사 같기도 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결국 개그맨이 되지는 못하였다. 나는 방송에서 개그맨을 볼 때면 그 지망생의 얼굴이 때때로 떠오른다. 지망생의 내공이 그 정도였는데 정식 개그맨은 얼마나 더 사람을 잘 웃길 수 있어야 시험에 통과할 수 있는 것인지. 사람을 웃음으로 이끌어 잠시 동안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참으로 훌륭한 재주이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유독 좋아하는 개그맨은 유재석이다.


목요일마다 그와 게스트 사이에 벌어지는 토크 공방전을 지켜보면서 이런저런 세상사의 고민을 잊고 작은 행복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야간매점 코너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나에게도 야간매점용 레시피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해서 이렇게 소개해 보는데.



재료는 역시 야간매점용이므로 저렴하면서도 빠른 시간에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인스턴트 미역국과 떡국 두가지만 있으면 된다. 떡국을 절반 정도 냄비에 들어내 깨끗이 씻은 다음 미역국 건조스틱과 함께 넣는다. 물을 떡이 살짝 잠길 정도 붓고 끓인다.



한소끔 끓고 나면 미역국 봉지 안의 동봉되어 있는 들기름을 뿌려주고 잠시 더 끊이면 요리랄 것도 없는 미역떡국이 완성된다. 떡국과 미역국이 웬말이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 레시피는 야간매점용임을 잊지말자. 밤에 출출하기는 한데 라면먹기는 꺼려질 때 제법 그럴듯한 음식이다. 맛은 그런대로 먹을만……



야간매점용 떡국을 우물거리며 드는 생각이, 유재석처럼 사람을 행복하게 웃음짓게 만드는 사람이 내 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유명한 개그맨이 아닐지라도.

줄갈기, 유목,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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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갈기.


아마 나 말고 다른 누군가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기타라는 악기의 줄은 어느 순간 아무리 조율을 해도 제 음을 내지 못하는 때가 있다고. 겉은 멀쩡해도 이미 수명을 다했다는 이야기다. 기타를 잘 다루는 사람은 기타줄을 잘 끊어먹지 않는다. 그러나 기타를 더 잘치는 훌륭한 연주가는 기타줄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기다지지 않고 수시로 새줄로 갈아버리는 법이다. 그래야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나는 훌륭한 연주가는 못되어서 그저 줄을 끊어먹지 않고 오래 사용할 줄 아는 정도의 사람이다. 줄의 수명이 다했는지도 뒤늦게야 깨닫는 심히 아둔한 수준의 그저 그런.


줄의 수명이 다했을 땐 과감하게 줄갈기를 해야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더는 효용이 없는 방식을 미련만 남아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목.


낡고 오래된 기타줄과 흡사한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해 이맘때쯤이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안에 유목민의 기질이 없음을 한탄하며 지냈던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를 손에 쥐고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를 고민하는 사이 여름이 왔고, 가을을 살았고, 겨울속에 움추려 지냈다.


그 옛날 유목민의 느린 걸음으로도 이정도 기간이면 사막을 횡단했을 시간이다. 물론 멍하니 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스스로가 가장 행복한지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내가 좋아하는 일의 새로운 기술도 접하였다. 다만 오랜시간 정착에 익숙한 농경민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오다보니 짐을 꾸리고 낯선곳으로 길을 나서는 변화에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생겼다고나 할까. 


유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헛웃음 나오는 꼬락서니일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홀홀단신이었던 칠년전에 비해 너무나 많은 짐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노새도 나귀도 없이 사막을 횡단하기가 그래서 두려웠을까?



흘러간다.


남들 며칠이면 뚝딱 해버릴 결심을 하는 데에 일년이 걸렸다. 남들 하루만에 뚝딱 하고 싸버릴 짐을 분류하고 꾸리는 데에 일주일이 걸렸다. 너무도 느리고 요령없는 나지만, 이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련다. 이게 바로 변할 수 없는 나니까. 


자, 이제 흘러갈 일만 남았다. 내일이 선명하진 않지만 앞으론 너무 많은 선택지를 놓고 고민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꿈이라는 것이 있었을 때도 내 안의 고민은 지금과 마찬가지의 무게로 무거웠다. 빨리 꿈을 이루지 못해 가슴을 졸이는 일도 있지 않았나. 걱정일랑 떨쳐버리자! 파랗고 넉넉한 목초지를 따라 나도 그들처럼 씩씩하고 유쾌하게 흘러가보자.


씩씩하고 유쾌하게…….




섬집아기, 기타로 쳐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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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보면 어쩔수 없이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관리나 자기개발처럼 요사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힐링이라는 단어입니다. 홈쇼핑 방송을 보다보면 듣게 되는 엉덩이가 업돼보입니다, 처럼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묘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리나 개발이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마케팅의 수단이듯이 힐링이라는 말도 결국 돈을 쓰라는 강요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몸매도 관리의 대상, 피부도 관리의 대상, 인생도 관리…… 거기엔 모두 적잖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 투성이고 또 그 트랜드를 따르려다 보면 과한 노동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 현대인의 운명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류의 언어를 듣다보면 좀 폭력적인 것은 아닌가 할  때가 있습니다.


힐링이 상처 받은 몸과 마음에 치유행위를 가한다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이해했을 때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상처받은 사실의 여부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 준 일은 없는가를 먼저 살펴야겠습니다. 그리고 꼭 힐링에 어떤 거창한 격식이나 물질, 사람이나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겠죠.


잘은 못치지만 [섬집아기]를 기타로 뚱땅거리며 이사람 저람들과의 일을 떠올립니다. 동시에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힐링이라면 힐링이겠죠. 제법 오래된 개인적인 방식의 힐링.


                                                                           섬집아기.gp5


악보를 첨부했습니다.

상전벽해, 수영만
자전거탄풍경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바다로 바뀐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변화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사람도 그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부산에서 상전벽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곳 수영만 근처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뽕나무나 바다 대신 흙먼지 풀풀 날리던 곳에 마천루가 들어섰다는 것 정도. 


건물이 들어선 곳 대부분은 예전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 흐르던 곳이었다. 매립을 통해 이 넓은 땅이 새로 생긴 것이다. 지하철이 아직이었던 시절엔 버스로 한시간은 예사로 걸리던 부산의 변두리였는데 요즘은 이 근처에 산다면 제법 방귀 꽤나 뀌고 사는 축에 든다는 대접을 받는다.



정비된 강변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다보면 한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뉴욕 맨해턴의 분위기가 대체로 이렇지 않겠나, 하는 착각에 빠진다. 해운대와 광안리가 지척이고 주거환경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탓에 경제적인 부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살기에 썩 괜찮은 공간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나에겐 이제 이 주변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멀리 영화의전당 건물과 세계적(?) 규모의 쇼핑센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욕심이 있다면 이 풍경속에 자랑할만한 세계적 규모의 도서관도 하나쯤 있었으면 싶다.



먼 바다 대양에서 예리하지 않은 바람이 불어왔다. 아! 모처럼 부산다운 날씨다. 모름지기 부산의 겨울은 요며칠처럼 선선한 정도여야 정상이다. 고개를 들어 먼데 겨울하늘을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은 하늘뿐이었다. 그런 하늘이 오늘은 전혀 지겹지 않았고 되려 반가웠다. 나도 누군가에게 겨울오후의 하늘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보고싶어서 언젠가는 한번쯤 다시 찾게 되는 그런…….







배송곳니
일상다반사

이렇게 치료 받고 나면 보철한 이의 수명은 어떻게 되나요?


솜뭉치를 입에 물고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은 입으로 치과 간호사에게 나는 그렇게 물었다.


반영구적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심드렁한 표정의 간호사가 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내심 기뻤다. 한번의 투자로 그렇게 길게 효과가 지속되다니. 치과라면 질색을 하던 내가 삼분의 이 이상 썩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배송곳니를 이른바 덮어씌우게 되기 까지는 당시 갓 좋아하게 되었던 S라는 여성 때문이었다. 웃으면 충치가 드러나게 되니 입을 다물고 굳은 인상으로 있거나, 불가피하게 웃게 될 때는 손으로 입을 가리던 것을 그 여자애가 싫어했기 때문에 더는 치료를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공간이 넓어 혀끝이 들락날락하던 곳게 제대로 보철이 덧씌워지게 되니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고 틈만 나면 신기해서 거울에 비춰보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그 횟수만큼 당시엔 S를 일상에서 자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적 빠진 유치는 지붕위로 던져버리고 새로 영구치가 생긴 것 만큼이나 내 일상에 S가 자리잡게 된 것이 기뻤었다.


S 덕분에 얻은 그 인공의 배송곳니를 사용한지도 햇수로 십삼년이 되었다. 아직까진 전혀 이상이 없으니 정말 반영구적으로 버텨줄 것도 같다. 동시에 잊고 살았던 S가 생각이 났다. 멀어질 땐 보고싶으면 어떡하나, 보고싶어서 죽을지도 모를 것 같더니 역시 한 십년이 지나니 마음의 상처도 무덤덤해지고 얼굴마저 흐릿하게만 떠오를 뿐이다. 다 늙어 주책이라고 할지라도 문득 떠오르는 옛기억을 막을 수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배송곳니가 영구적으로 버텨주는 한 나는 때때로 그녀를 문득 떠올릴 것이다. 이 형국은 어쩐지 내가 좀 손해를 보는 것 같다. 아마도 그녀는 살아가면서 나를 떠올릴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반지나 목걸이 따위를 선물하지 말고 성형수술이나 해줄 것을 그랬나? 화장할 때마다 생각나게. ……. 누군가에게서 잊혀진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혀끝으로 배송곳니의 주변을 더듬으며 다시 추억에 잠겨 보는데. 

앗!

혓바늘이 돋아 버렸네! 젠장.


낙동강 맥도생태공원의 가시연

31일
일상다반사

어른들은 저 나이가 되면 무섭지도 않나?


한참 어릴 때 윗풍 센 방안 윗목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10대가요제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고기냄새 배인 코트를 벗어 어머니에게 건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여차하면 손목이 헤지고 무릎 나온 내복 바람으로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판이기 때문이었다. 술이 모자랐는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술상을 따로 차리게 하여 젓가락 장단까지 곁들이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아버지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당시엔 평균수명이 60대였으므로 아버지는 명백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적어보였다. 어린 녀석이 별생각을 다하고 살았는데, 나는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면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 살아가나 싶었다. 아버지는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저렇게 술을 많이 드시나? 가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올 해의 마지막 날 31일이다.


꼽아보니 내가 그 때 그 날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 따위가 두렵지 않다. 지레짐작으로 아주 두려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더디 갔으면 하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이로 따지자면 몸은 이제 더 나빠질 일만 남은 셈이다. 다만 그점이 유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몸에 병이 생겨 모르는 이들에게 원하지 않는 신세를 지지나 않을까, 그게 오히려 두렵다.


새해부턴 몸이라도 제대로 건사해야겠다. 불끈!


31일. 차고도 메마른 겨울바람이 분다. 바람의 형편이 그러하니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덩달아 건조해진다. 영혼마저 바싹 말라 누가 툭 건드리면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겨울의 대기속으로 흩어질 것만 같은 날이다. 


해피 뉴 이어.

고요하고 거룩한 밤의 요셉
일상다반사

마리아와 남편 요셉의 고향은 나사렛이었다. 그랬던 그가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길을 나섰던 것은 당시 이스라엘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본고장을 찾아야 했다. 성서 누가복음의 이 기록은 그러나 역사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그 시기가 예수의 탄생일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마태복음의 기록엔 헤로데 왕 때 두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피신하였다고 전하지만 이 또한 누가복음의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아서 가끔 혼란을 준다.


성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요셉은 고향을 떠나 베들레헴에서 아이를 얻었고 한동안 고향이 아닌 외지를 떠돌다가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딱히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건 아니건 우리는 예수가 남녀간의 생물학적인 결합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어쨌든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의 몸에 결혼도 하기 전에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된다. 복음서의 기록엔 그는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 말은 얼핏 흘려넘기기 쉽지만 무서운 뜻을 함의하고 있다.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당시 유대사회의 율법은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마을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한 자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옆집 사람이 굶어 죽어도 몇달 뒤에나 발견되기도 하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당시엔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는 것은 작은 유대공동체사회에서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요셉의 갈등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이런 일이 당신에게 벌어졌다면 당신의 선택은 어떠했겠는가? 물론 성서의 기록은 천사 가브리엘을 동원해 요셉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은 상식적인 입장에서 이 사태에 대해 아주 다양한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상상은 일단 접어두자. 


호구조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요셉은 이 얄궂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고향에서의 출산과 삶을 포기하고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조용히 광야로 길을 나선 것이다. 광야의 흙바람을 이겨내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 그곳에서 두 사람은 변변한 방조차 구할 수 없었다. 아내는 진통을 시작했고 결국 작은 마굿간에서 자리를 만들어 새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게 되었다.


산고 끝에 태어난 후 말구유에 포대기로 덮혀 있던 이가 바로 예수였다. 친지들의 도움과 축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몰래 얻은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마리아가 수유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그는 마굿간을 나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선택과 새생명을 이끌어주신 그가 믿는 유일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평화!


예수가 태어난 첫날 가장 고요하고 거룩한 이는 바로 그 사람 요셉이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예수, 두 생명을 지켜낸 이순간 어쩌면 그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동시에 받았을 지도…….


메리 크리스마스.



마음 한켠이 휑하던 날, 다대포.
자전거탄풍경



마음 한켠이 휑한 날이다. 바다를 보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길을 나섰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바다는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었다. 나의 간절함보다 그들의 간절함이 더 컷기에 결과가 이렇게 나왔겠지 자위해보지만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무관심마저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니 결국 이 나라에 사는 한 어떤 형태로든 정치에 관계될 수밖에 없다. 해서 저 반칙과 특권의식으로 가득찬 자들의 후퇴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건만……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하루의 해가 다대포 바다 너머로, 낙동강의 갈대숲 사이로 떨어지고 있다. 앞으로의 나날을 이 대자연처럼 무심하게 버텨낼 수 있을까? 


바다 앞에서 나는 쉽사리 자신할 수 없었다.





혼자 고기를 구워서 먹는 일
일상다반사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의 순위를 매긴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이 가격보다 더 저렴한 곳이 있을까, 싶은 싸구려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싼 상추쌈을 입으로 가져가며 상오가 한 말이었다. 원산지가 의심스러운 삼겹살을 뒤집으며 눈빛으로만 그게 어떤 건데? 하고 나는 물었다. 


혼자서 영화 보기, 혼자서 밥 먹기…… 영화는 혼자 보기가 습관이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집에서도 아니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기란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었다. 난 혼자 식당에서 곧잘 밥을 먹는데, 얼마전에는 이 삼겹살집에서 혼자 고기도 구워먹었다구.


상오의 입이 벌어졌다. 저작되다 만 음식물이 보였다. 역시 강적이시군요. 혼자서 하기 제일 힘든 일이 이런 식당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서 먹는 일이라더군요. 뻘쭘해서 죽을 수도 있대요. 상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먹는 일에 열중했다. 불판에 잘 구워진 김치가 요즘 입맛을 당기는 음식이다. 뱃속이 어떻게 된 일인지 영 꼬여있다가도 이 단순한 음식을 먹고 나면 다시 편안해지니 주기적으로 찾지 않을 수 없다. 서해를 건너온 김치의 속살이 유난히 희었다. 신선해 보이라고 무슨 약품을 친다는 풍문이다.


형님 대접한답시고 상오가 집게와 가위를 들고 고기를 굽고 자르는데, 그 손놀림이 영 서툴다. 아이씨, 저는 이따위 기능적인 부분에서도 남들에 비해 뒤떨어져요. 이러다간 영락없이 독거노인 신세로 전락할 것 같아요. 


습관이야. 습관. 자주 하다보면 요령이 붙지. 나는 집게와 가위를 낚아채서 시범을 보였다. 그렇지…… 습관. 이렇게 상오와 같이 고기를 구워먹다가 다시 혼자서 먹는 날이면 제법 힘들어지겠지. 투덜거리며 소주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상오를 잠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속으로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언제나 좋은 형이 되고 싶단다.



서울견문록8 하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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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인연들과 모처럼 주말을 이용해 자전거 타기에 나섰다. 행주산성을 거쳐 점심은 그 유명하다는 원조국수집에서 먹었다. 맛은 모르겠고 엄청나게 많은 양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점심이었다. 시간이 남아 하늘공원으로 자전거의 방향을 틀었다. 오르막을 오르기 전 자전거 공원에서 바라다보이는 한강의 윤슬이 지나온 시간을 되새겨보게 만들었다. 


강물처럼 나도 어쨌든 어디론가 흘러가겠지. 


이 한강의 풍경과 이후 올라갈 하늘공원이 이번 서울행의 마지막 볼거리일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쉬움 반 홀가분 반이다. 처음 마음이야 오랜만에 상경했으니 느긋하게 이곳 저곳 들르고 싶은 곳도 많았지만 빡빡한 교육일정에 숙소에 들어가면 피곤해서 드러눕기에 바빴던 나날이었다. 막상 교육이 끝나니 그저 빨리 집에 가서 익숙한 내 방안에서 쉬고 싶었다. 이제 나도 집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울 나이가 된 것이었다.


교육은 아무리 받아도 미진한 것. 어떻게 보면 어떤 일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자격이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는 일일 것이다. 그 나머지는 내가 헤쳐나가면서 익혀야 할 일. 


잡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하늘공원쪽으로 돌렸다.



부자연스럽고 뜬금없는 선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거기가 하늘공원이란다. 거대도시 서울의 모든 잡동사니 허섭쓰레기들이 쌓여서 악취를 풍기고 있던 곳이었단다.


지금이야 쓰레기를 분리수거도 하고 소각과 매립을 나누어서 한다지만 이 쓰레기의 큰 산이 이뤄질 적에는 그저 파뭍고 쌓기에 바빴던 시절이었다. 저렇게 쌓이기만 하면 어쩌나 하던 곳이 공원이 되었다니…… 사람들은 이곳에는 풀한포기도 자라지 못할 거라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러던 곳이 이렇게 변했다.


자연의 힘은 도대체 어느정도까지일지 가늠 조차 쉽게 안된다.



동생뻘 되는 아이가 말했다.


- 형님, 저기 맞은 편 아파트는 아직까지 이곳 때문에 아파트값이 잘 안오른대요.


하긴 이렇게 대규모로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면 아무리 큰 강을 끼고 있더라도 맞은편까지 영향이 없을 수 있었겠나 싶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데크에 나란히 서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들의 미래가 이곳처럼 훗날 더 나아진 모습이었으면, 하고 나는 바랐다. 그리고 여전히 친해지지 않는 서울에 작별을 고했다. 


서울, 안녕.




억새가 한창인 하늘공원


매립지 내부에서 발생하는 가스는 에너지로 사용된다고 한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전망대에서 바라다보이는 한강의 풍경이 아름답다.







부산... 첫눈.
일상다반사

자주 가는 단골 슈퍼마켓 주인장에게 올 가을 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겨울엔 제작년처럼 눈구경 한 번 제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인장은 손사래에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아유…… 눈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태백이었다. 평생 살아도 부산에서 눈구경하기란 말 그대로 가뭄에 콩나듯 했던 나와는 눈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것도 기후변화 때문인지 제작년에는 눈이 제대로 내렸다. 한 이틀 부산이라는 도시가 온통 마비가 될 정도로.



어떤 이들은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느니 도시기능의 마비가 어쩌고 하면서 걱정들이 많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좋았다. 다들 어디론가로 향한 움직임을 멈추고 하얗고 고립된 세계 안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모습들이 그리고 그 느리디 느린 시간의 흐름들이.


수상한 기척이 있어 내다보았더니 바깥은 그때처럼 한참 설국이 진행중이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얗고 고립된 세계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눈이 떨어지는 속도는 초속 십오센티미터 정도.


한 이틀 계속 이랬으면 싶었다.

























서울견문록7 종묘
자전거탄풍경

만약 종묘를 이십대 시절에 들렀더라면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어릴적에는 입에도 못대던 음식의 깊은 맛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창덕궁에서 큰 길을 하나 건너니 종묘가 지척에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면서 종묘 역시 관람객의 출입이 일정수준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관람객 숫자 이내에서 문화해설사의 인솔에 따라야만 관람이 가능했다.


이를 두고 관람객과 시설관리를 맡고 있는 측에서 심심찮게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내돈 내고 내가 보는데 무슨 해설 따위가 필요하냐. 이러쿵 저러쿵. 그도 그럴것이 시간을 잘못맞추면 한시간 이상을 바깥에서 기다려야 하니 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표도 예매한 시간에 정확하게 들어가야 하는 세상이다. 


나의 경우도 이런 규칙이 처음엔 낯설어서 잠시 망설였다. 앞의 차례는 이미 정원이 차버렸고 다음은 외국인이 출입하는 순서여서 한시간 반 이상을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발길을 되돌리려 하다가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다시 오겠나 싶어서 기다리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님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따라서 왕조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례가 행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죽은이들을 기리는 곳 근처의 종묘공원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괜히 기분이 묘해지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내 성격이 이렇게 여럿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낯선이들과 섞인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못견뎌 하는 터라 그랬을 것이다.


공원의 어르신들은 대선후보에게 쌍욕을 하기도 하였고 거의 대부분은 장기와 바둑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몇몇은 삼삼오오 모여서 한시를 적은 후 크게 읽으며 뜻을 풀이하기도 하였다.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일로 소일하고 있을지가 사뭇 궁금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사고하는 능력과 지식을 흡수하는 방식에서 만큼은 좀 유연한 상태로 늙었으면 하고 나는 바랐다.


서울에서 잔술값과 이발비가 가장 저렴한 곳이 종묘공원 이곳 아닐까, 싶었다.


깊이는 느낄 수 없지만 나름 멋을 부린 글씨들, 종묘공원 어르신들의 길바닥 작품이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로 입장을 하자 문화해설사의 자기소개와 종묘에 관한 역사해설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다들 투덜투덜에 심드렁하게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점점 해설의 깊이가 깊어지자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귀를 쫑긋하고 집중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런저런 질문까지 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자, 이러니 해설 없이 종묘를 한 번 쓱 훑고 나오는 일은 관람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다. 종묘가 처음인 사람이라면 되도록 자유관람이 허용되는 토요일보다 다른 날을 잡아 해설을 들으며 관람하는 것이 더욱 뜻깊은 일일 것이다.




좌우로 임금님과 세자가 걷고 가운데는 돌아가신 역대 임금님이 신의 위치가 되어 걷는 길이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종묘의 건축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되도록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삼가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조상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치장이 의미가 없고 되려 잡스럽게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되도록 엄숙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물은 물론 연못이나 박석에도 별다른 꾸밈이 없는 것이 다른 궁궐건축과의 차이라고 했다. 동시에 다른 궁궐 건물의 입구마다 있는 현판도 없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신을 위한 공간이므로 일체의 언어마저 의미가 없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은 사람들이 길을 잊어먹지 않게 하거나 제대로 위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슨문, 무슨각, 하고 이름을 써서 붙이는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신의 영역에서는 이 조차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듣고보니 모든 건물엔 일체의 글씨가 없었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제례에 쓰일 음식을 만들던 공간, 전사청



정전에 들어서니 그제서야 단체관람이 아니었다면 약간 색다른 느낌의 종묘를 느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건축물이 이렇게 간단명료할 수도 있다니, 하는 놀라움도 들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해설사의 설명이 귀에 잘 안들어왔던 것 같다.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셔터를 누르기 바빴는데 지금 확인하니 실제 종묘의 분위기가 제대로 반영된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너른 마당 앞에서 악사들이 종묘제례악을 연주하고 있고 임금님이 엎드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유교라는 새 방식의 건국이념을 이보다 더 강하게 뭇백성들에게 어필하는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방식이야 조선왕조 이전에도 어찌 없었겠나, 그러나 이를 새롭게 제도화하고 형식화하여 국가의 근간인 이념적인 틀로 만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금님이 당신의 부모와 할아버지를 정성으로 받드는 것과 같이 백성들이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 줄 것을 새 왕조의 임금님은 바랐을 것이다.


왕조의 바람은 결국 영원할 수 없었고 종묘만 남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오늘날에도 매년 제례는 벌어지고 있는데 임금님을 대신하여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추천한 일인과 역대 왕후를 배출한 집안에서 추천한 여성 일인이 절을 올린다고 한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예전 법도에는 여성은 제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변화를 뛰어넘는 것은 왕조는 물론이고 유교나 유교전통을 바라보는 우리 의식의 변화일 것이다. 문득 사람의 일이 작고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과 변화의 흐름속에서 사람은 잊혀지기 쉬운 것이겠지…….


종묘를 빠져나오며 다시 한 번 정전쪽을 돌아보았다. 요즘 괜히 뒤돌아보는 일이 잦다. 


나이 탓인가 보다.


왕의 신주를 모신 곳이라 규모가 크다.


정형화되지 않은 박석의 배치가 오히려 눈이 덜 피곤했다.










오년상이 끝나면 위패가 이 길을 따라 올라 종묘에 자리를 잡게된다.



서울견문록6 낙선재
자전거탄풍경

하마터면 창덕궁 구경이 후원과 창경궁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끝날 뻔했다. 후원은 관람객들로 이미 예약이 만료된 상태여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그 아쉬움을 미리 대비라도 한 것처럼 낙선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우리 궁궐에 낙선재와 같은 공간이 없었더라면 그 멋이 덜했을 것 같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전각도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생활의 냄새가 덜한 공간이다보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수가 없다. 선뜻 다가서기 좋은 공간은 오히려 낙선재와 같은 곳이다. 댓돌에 발을 올리고 툇마루에 앉으면 앉은키에 높이가 딱맞아 몸이 편안했고 시선을 위로 올리니 네모난 하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우리 한옥의 멋을 살린 건축물이다보니 시선이 가는 곳은 어디라도 예사로 보이지 않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에 건물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일은 몹시 신산한 곳이 낙선재이다.



고종과 순종이 이곳에 기거한 것은 물론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친족들이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채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황태자이자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삶 자체가 왜곡으로 강제되었던 영친왕 이은과 황태자비인 이방자, 일본명 나시모토 마사코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도 마찬가지.


조선왕조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자기나라 일왕은 그렇게 떠받들기 바쁜 자들이 조선왕조와 그 일가에 가한 위해는 글로 다 옮기지 못할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낙선재는 그들의 일을 빠짐없이 목도하였을 터인데 2012년 가을엔 그 어떠한 기미도 없이 주변이 한가롭기만 하였다.


자전거의 핸들을 종묘로 꺾었다.


낙선재의 색은 강렬하지 않고 연한 파스텔톤이어서 일반적인 궁궐과 구분된다.




툇마루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애기나인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 것 같다.







서울견문록5 창덕궁
자전거탄풍경

경복궁 건너뛰고 창덕궁이라니 따지고 보면 좀 앞뒤가 안맞는 일이다. 그러나 태생이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경복궁은 괜히 꺼려져서 다음을 기약하고 창덕궁을 찾았다. 사실은 이번 나들이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종묘이다. 종묘 가는 길에 창덕궁이 있어 그냥저냥 들르게 되었다. 


궁궐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그 규모가 몹시 큰 곳이었다. 다른 나라의 문화재보다 물리적인 크기는 작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궁궐을 거닐다보면 과장이나 요란한 치장이 없어서 좋다. 필요에 따라 짓고 가끔은 소박하면서도 나름의 멋은 또 나름대로 부리고 있는 간결한 맛이 있어서 좋다.




궁궐 지붕 다소 밋밋할 수도 있는 공간에 어처구니가 자리잡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인정전 가는 길



인정문을 지나니 조선왕조의 위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인정전과 품계석이 나타났다. 난리통에 임금이 피난을 가기도 했고 이 앞에서 잔치와 과거가 치뤄지기도 했다. 왜란과 여러차례의 화재, 그리고 갖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자리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이날의 인정전 앞 큰 마당엔 가을 햇볕만이 평화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인정전 내부






화려한 팔작지붕의 인정전




화려한 색상이 눈길을 끈다.


드므라는 명칭이 독특했던 방화수 용기.


이런 구석진 곳에서 신하들과 궐내 나인들이 밀담을 나누었을 듯.



창덕궁 후원은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라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이 쉽지 않다. 정해진 숫자의 관람객만 입장을 허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주말에는 더더욱 관람이 쉽지 않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궁궐을 빠져나오는데 흐르는 물마저 잡스럽지 않게 다스리려 했던 왕조의 이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뜻만은 기억할 만하였다.



서울견문록4 시청과 광화문
자전거탄풍경

자전거 타기가 일상사가 된지 꽤 오래된 나에게도 서울의 번잡한 시가지를 관통하기란 쉽지 않았다. 상업밀집지역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은 그래도 비교적 자전거도로가 정비되어 있어서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시청에 가까워질수록 교통체계도 그렇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량의 흐름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한 때 강남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었다. 거기 지인이 한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간다고. 당시 내 입장에선 서울에서 특정지역을 별도로 구분하여 시내라고 부르는 것이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강남 사람인 그에게서 시내란 시청을 중심으로한 종로, 명동 그 근방이 시내였던 것이다. 당시엔 한참 번화해지고 있고 화려한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 강남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들은 풍월이 생기니 역시 서울을 대표하는 표정은 시청과 광화문 일대가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교육기관의 원장이 휴일 뭐할거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 오랜만에 서울 왔으니 시내구경이나 해야죠.


- 시내? 강남?


- 아뇨. 시청 근처 들렀다가 종묘에 가볼까 해요.


내 대답에 골수 서울시민인 그의 표정이 살짝 당황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참 많이 변한 서울시청 앞



용산을 지나 숙대앞을 지났다. 서울역을 지나 시청에 다다르니 내 기억엔 서울의 풍경 중 가장 많은 변화가 있는 곳은 바로 이 근처가 아닌가 싶었다. 좋은 뜻으로 예전에 비해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이었다. 그 예전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곳은 자전거로 다니는 것이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심심찮게 자전거라이더들이 눈에 띄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서울의 특별한 시민들이 이 광장을 소유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지금도 감지덕지지만 개인적인 생각엔 길이를 줄이더라도 좌우에 차량을 다른쪽으로 우회하게 하고 나무를 심어 녹색공간을 늘였더라면 더 금상첨화가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에 접어들자 자전거에서 내려 걸었다. 좌우의 차량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은 광장이 광장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못하게 억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광화문광장을 대표하고 있는 세종대왕상





광장에서 앞으로 걸어가면 맞은편 북악산 산자락 아래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경복궁이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서울엔 돌산이 많아 주위를 둘러보면 은근히 보는 맛이 좋다. 경복궁 내부는 다음으로 미루고 자전거를 창덕궁 방향으로 돌렸다.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많은 시민들이 수문장의 교대행사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다음으로 미룬 경복궁, 지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창덕궁과 종묘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인사동거리를 스쳐지나갔다. 풍문에 비하면 그렇게 우리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람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자본의 힘이 가만 놔두지 않고 침범하지 않았나 싶었다. 자전거를 되돌려 나오는데 정면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꼈지만 정말이지 낯설지 않아서 자세히 보니 방송연기자 김남주씨였다. 옆에 그의 딸로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서울을 찾은 첫날처럼 예전 같으면 이 어여쁜 연기자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크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김남주씨와 아이를 부드럽게 우회하여 천천히 스쳐지나가면서 어쩌면 이런 자잘할 일상들,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보던 사람을 우연찮게 길에서 마주친다거나 내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문화재를 마음만 먹으면 힘들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일이 사람들을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가을치고는 제법 더웠고 등엔 땀이 찼다.



서울견문록3 용산 전쟁기념관
자전거탄풍경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을 문득 만날 때 여행은 즐거워진다. 살짝 지루했던 교육기간중 모처럼 휴일을 맞아 시청방면으로 관광삼아 자전거를 저어 나갔다가 전쟁기념관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괜히 전쟁이라는 단어와 기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할 것이 없어서 피흘리며 싸운 전쟁 따위를 기념할 것까지야,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엔 그저 스쳐지나가는 길이었다. 잠수교 지나 용산 거쳐 시청 주변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를 둘러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문화재보다 용산 미군기지 좌우로 높이 자란 플라타너스가 나를 먼저 맞이해 주었다. 이런 풍경은 이곳 아니면 오히려 찾기 어려운 풍경이다. 웃자란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잘려나가기 십상인데 되려 미군기지 근처이기 때문에 이렇게 무사히 크고 높게 자란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맞이한 전쟁기념관의 첫인상은 크고 웅장함 그것이었다.



처음엔 정문이 아니고 옆문을 통해 입장하게 되었다. 입장료를 받는 곳이 아니다보니 특별한 안내가 없었던 탓이다. 기념관의 오른쪽 마당에는 이런저런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 것은 2002년 서해교전 당시의 고속정이었다. 피탄 흔적까지 그대로 복원해 놓은 함정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각국의 무기들이 어떤 것은 모형으로 혹은 실물 그대로 전시되고 있어 기념관을 찾은 아이들은 즐거워하였다. 나이 지긋한 노병들은 잠시 군대시절을 회상하는지 무기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곤 했다. 중간쯤 가니 현역시절 친숙했던 장비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나도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항공기 전시관의 대형수송기


국산전차는 물론이고 한국전쟁당시의 전차도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공방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미사일, 개인적으로 친숙한 무기체계다.




미그 19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걷는데 이웅평씨가 몰고 귀순한 미그-19가 보였다. 요즘은 민방위훈련의 강도가 예전같지 않지만 이웅평씨가 귀순할 때의 당시 상황은 참으로 가슴 오싹한 순간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흘러나왔던 아나운서의 다급했던 멘트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 지금은 실제상황입니다. 훈련상황이 아니고 실제상황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질서정연하게 가까운 건물지하나 지하철 그리고 대피소로…….


어린 나이에 당장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안절부절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가끔 지금도 이 일을 떠올리면 세상엔 이해하기 힘든 일 투성이라는 생각이다. 북한 최고 엘리트였던 그가 미그기를 타고 귀순한 것도 그렇고 귀순동기도 우습고 방공망이 쉽게 뚫린 것도 그렇고. 하긴, 얼마전엔 노크귀순도 있었으니.


어쨌든 그날의 일로 일순간 전국은 전시상황에 준하는 상태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민방위 훈련의 필요성이 입증된 날이기도 했다. 동네 슈퍼마켓의 라면이 동이 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고.


코브라헬기



전쟁기념관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던 나는 참수리호 모형을 보는 것으로 볼거리가 끝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자 비로소 나타나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관 건물과 기념 조형물이 시선에 들어오자 그 규모에 놀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마지막 어머니의 모습에서 전쟁의 비극이 단적으로 느껴진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 노병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평화를 깨려는 자들을 사전에 제거해야.


기념관 입구의 긴 회랑엔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관 내부는 외부에서 느껴지는 웅장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적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와 각종 병기들의 단순한 나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터라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신기하게 비춰지는 것들이 오히려 나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방학 때면 거의 반드시 숙제에 들어있던 반공서적 독후감을 수시로 써냈던 터라 해설사들의 해설내용마저 단조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사자명단이 설치되어 있는 회랑




기념관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거북선


전쟁영화에서 많이 봤던 따발총이 전시되어 있어서 눈길이 갔다.


삐라의 내용이 웃음을 자아냈다.


지금도 한국전쟁 당시의 유해 발굴작업이 진행중이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욱 폭넓게 진행되어야 한다. 구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더 많은 자료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없이는 앞으로도 같은 비극이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기념관이라는 명칭보다는 전쟁역사관이 적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정문을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소설가가 인용한 어린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어머니, 우리는 지금 중대라고 하지만 오십 명뿐입니다. 적의 대부대는 다시 이 고지를 빼앗으러 올 것입니다. 우리도 빼앗았으니까 적들도 빼앗겠지요. 우리는 지금 참호 속에서 거총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적들은 기척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풀 먹인 여름옷을 입고 싶어요.'  


-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158쪽



서울견문록2 남산
자전거탄풍경

베이비붐 세대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의 삶은 당연히 서울에서 이어질 것으로 여기며 컸다. 누이가 그랬고 멀게는 이모들이 서울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으니.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는 것으로 보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일생에 있어 서울이 빠진다면 뭔가 부족한 인생으로 여겨질 법도 했다. 그걸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3때 친구들과 허름한 자취방에 모여 우리는 이런 약속 따위를 하곤했다.


- 우리 서른살이 되면 서울 남산타워 아래에서 모이자. 무슨일이 있더라도 딱 서른이 되는 오늘 각자 성공한 모습으로 남산타워 아래에서 모이는 거다. 


우리들에게 서른이라는 나이는 몹시 먼 훗날의 일이었으며 그 나이쯤 되면 뭔가 대단한 성취를 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머리를 맞대고 엄지손가락에 뻘건 인주를 뭍혀 지장까지 꾹꾹 찍으며 맺은 약속은 흐지부지 되었다. 친구들과의 남산행은 더 일찍 이뤄졌다. 군대가기 전 서울여행 때 남산을 오르고 그 이후론 모두들 자기 살기 바빠서인지 어릴적 치기어린 약속 따윈 잊어버리고 산 거였다. 


자전거를 친구 삼아 오르는 남산도 썩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 주인이 바뀌어 버린 63빌딩


잠수교아래로 더 잘 정비된 자전거도로, 생뚱맞은 이름의 새빛둥둥섬도 보인다.



한강을 건너 국립극장 방면으로 꾸준히 이어지는 오르막을 오르니 점점 초록의 기운이 느껴졌다. 서울의 중심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릿한 대기가 거대한 도시 서울을 감싸고 있었다. 중간중간 나무난간으로 만든 전망대엔 휴일이라 전국팔도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 서울에 살면서도 여기 한 번 오기가 참 어렵네요. 언제 왔는지 기억도 안나네.

- 이 길이 무한도전 팀이 촬영을 한 곳이야.

- 저기! 건너편…… 우리집 있는 곳이다.


사람마다 사연도 제각각이었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등엔 땀이 났고 자전거를 한곳에 기대어 놓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릿한 하늘과 남산타워의 첨탑으로 시선을 돌리니 풍경 너머로 추억속의 친구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남산산책로 중간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서울시가지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한남대교, 서쪽으로 하루의 해가 지고 있다.

서울견문록1 여전했던 한강 자전거도로
자전거탄풍경

햇수를 헤아려보니 딱 9년만이었다. 내가 서울에 자전거를 끌고 다시 찾아온 것이……. 얼추 10년이니 강산이 한 번은 바뀌었을 법한 세월이다. 교육기관과의 상담을 마치고 숙소를 정한 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도로에 접어드니 마침내 서울에 당도하였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9년전 참 많이도 오갔던 길은 거짓말처럼 큰 변화가 없었다. 변화를 억지로 찾자면 보행자길이 추가가 되었다는 것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의 연령이나 성별 그리고 자전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영등포에서 여의도방향으로 달리는 한강자전거길, 멀리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갓 스무살이 되어 서울을 찾았을 때와 서른 언저리였을 때와 지금 눈으로 확인하는 서울은 많은 차이가 있다. 어릴적 눈에 비친 서울은 모든 것이 새롭고 거대하며 사람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내눈을 확 잡아끄는 것이 그다지 없다. 별 내용이 없는 사람이지만 식견이 들었나보다.


풍경이야 그럴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내면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맞은편의 강북, 서울특별시민이 아니어서 강남과의 차이를 모르겠다.


서울에 한강과 자전거도로가 없었더라면 끔찍한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폐기관과 모세혈관과도 흡사한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며 예전 기억을 떠올려본다. 변화, 변신을 모색하기 위해 9년전 새벽차를 탔던 내가 다시 이곳에 왔다. 그때와의 차이라면 설레임과 기대는 사라지고 무덤덤에 냉정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이번 짧은 서울생활을 마치고 나더라도 나에게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저 의례적인 수료증과 함께 내 이름 앞에 붙을 타이틀 하나가 늘어나는 정도일 것이다. 한강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희미했던 기대마저 더욱 억누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냥 일종의 선물. 나에게 주는 조금 비싼 선물이라고 치부하자. 남들은 해외여행도 다니지 않나…… 언젠가 이 나날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재미나고 신나게 지내보자.


나는 자전거의 방향을 돌려 한 평 남짓 숙소로 향했다. 페달을 밟는 발길이 무겁지 않았다.


도색이 눈길을 끄는 한강철교




맞은편에 보이는 남산타워


한강의 물억새, 가을이 절정이다.

낙동강의 가을
자전거탄풍경

 

 

낙동강을 지척에 두고 있는 곳에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강의 표정 변화에서 세월의 변화를 읽게된다. 이 계절에 부산에서 가장 큰 볼거리라면 역시 부산국제영화제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사상구 삼락공원변의 대규모 갈대밭이다.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이런 장관이 있다는 것은 복이라면 복이다.

 

규모면에서라면 전국 최대규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양에 물억새가 흔들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거창한 철학이 아닐지라도 차분히 지나온 한 해와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된다. 사람의 키높이를 훌쩍 넘어서는 갈대밭 사이로 군데군데 오솔길이 나있다. 홍수에 물이 들었다가 빠져나간 뒷자리가 조금 어수선하지만 그래도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가을엔 놓칠 수 없는 곳이 낙동강의 이 오솔길이다.

 

 

       ▲ 지자체에서 심어놓은 코스모스도 한창이다.

 

       ▲ 인근 삼락공원 내부엔 무료주차장과 텐트를 설치할 수 있는 장소가 많다.

 

 

 

맛집이라는 단어에 대해 크게 공감을 못한다. 혀가 깊은 맛을 구분할 정도로 섬세하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사람 심리라는 것이 사람 북적이는 음식점에 괜히 눈길이 한 번 더 가게 마련이다. 평소 지나가다보면 앉을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가게가 동네에 생겼다. 지하철 덕포역 2번 출구 근처의 꼬리고기집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곳이라 지하철 역에서 내려 꼬리고기집을 찾으면 된다.

 

운이 좋았는지 마침 자리가 있어서 냉큼 앉고 주문을 했다. 오랜만에 맡는 연탄가스 냄새가 옛생각을 나게 만들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건설일용노동자의 거친 사투리 소리가 크게 났고,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중국인 남녀가 북경어로 노래하듯 떠들고 있었다.

 

 

음식은 간단했다. 돼지고기의 인기 없는 부속물을 듬성듬성 썰어 한 번 삶은 뒤 나오는 것이 음식의 전부다. 무슨 비법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다른 사람 다 맛있다는데 나만 맛없는 것이 이상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돼지고기가 일차적으로 한 번 삶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지방층이 많은데도 크게 느끼하지 않았다.

 

가래떡을 불에 구워 먹는 것처럼 돼지고기는 연탄불에 꾸덕꾸덕 익어갔고 나는 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으로 가을을 삭혔다.

 

음식은 깨끗한 재료로 정갈하게 조리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평소 생각이어서 어떤 평을 내릴 수 있는 식견이나 감각이 나에겐 없다. 해서 다 먹고 일어서는 순간까지 별다른 음식에 대한 수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음식의 가격이었다. 양은 두사람이 먹어도 넉넉할 정도였는데, 가격은 한 접시에 칠천원이었다. 순간 이 허름한 음식점이 맛집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비결은 가격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에 지친 서민들이 어디가서 이렇게 저렴하게 고기안주에 소주 한 잔 걸칠 수 있을까.

 

값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주 기운에 연탄가스 기운까지 겹쳐니 느닷없이 찾아온 가을이 견딜만하였다.

 

 

 

간절곶 가는 길
자전거탄풍경


부산에 사는 사람의 호사는 마음만 먹으면 동해와 남해 그리고 높은 산, 길고 넓은 강을 지척에 두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다 똑같아 보이지만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남해의 바다는 호수를 닮은 바다이고 동해는 넙죽 엎어져 한바탕 목놓아 울기 좋은 바다이고 서해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몰래 선물을 슬쩍 던져주고 내빼버리는 친구와도 같은 바다다.


올해 들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러 바다를 접했다. 꿈속을 떠다니는 듯했던 제주의 바다도 좋았고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크게 안고 있던 남해의 바다도 좋았다. 목표는 되도록 많은 바다를 보고자 했으나 천성이 게으르다보니 동해와 서해는 차일피일 하게 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더는 못참아 줄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자전거에 기름을 치고 주섬주섬 가방을 꾸렸다.


구월의 햇살과 바람은 자전거 타기에 제격이었다. 폭염으로 기억될 올 여름이어서 가을이라는 계절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 해운대는 여전히 공사중: 갈 때마다 지형과 하늘의 선이 변하고 있다.


센텀고등학교: 고등학교 이름이 센텀고등학교다. 줄여서 센고.


한시간여 달려 당도한 해운대 해수욕장이 몹시 반가웠다. 아무래도 도심을 자전거로 관통하자면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은근히 힘이 든다. 답답하던 자동차의 물결을 벗어나 바다를 접하자 가슴 한켠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상쾌함도 잠시 백사장을 살펴보니 썩 개운치 않은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해운대 배후의 건물들은 하늘에 닿을 듯 높아만 가는데 해수욕장의 모래는 그 폭이 갈수록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십년전의 기억과 비교하면 해수욕장의 모래 규모가 초라해 보일 정도다.


백사장 없는 해수욕장이란 참으로 허전한 일이어서 시에서는 개장 전에 천평방미터 이상의 모래를 트럭에 싣고와 까는데 모래의 원산지는 한 때 전북 군산 어청도의 모래였다. 모래의 입장에서는 동서화합이 먼저 이뤄진 셈이다.


아마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공간에 대한 탐욕이 억제되지 않는한 개발과 보존은 같이 가기가 참 어려운 문제다. 멀리 오늘 넘어갈 달맞이 고개에도 더는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빌라와 카페가 한 가득이다.


해운대는 영화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준비가 한창인 해운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바라다보이는 고층빌딩 숲


해변의 다정한 연인들: 구월이지만 가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남성은 아시아계였고 여성은 금발의 러시아계여서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미포에서 바라다 본 해운대 해수욕장: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니 확실이 무분별한 개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늦게 출발한 탓에 시간은 어느덧 점심때였다. 해월정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 들어갔다. 만만찮은 가격대의 메뉴들이라 멈칫하고 있다가 그냥 나가기 뭐해서 주저앉았다. 옆 테이블을 살피니 다른 손님들이 식당의 주메뉴가 아닌 음식을 들고 있었다. 사람이 해가 갈수록 멍청해져 가는지 이 음식을 어떻게 부르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중국교포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 저기 저 손님들이 드시는 것이 뭐죠? 저걸로 주세요.

- 백반으로 드릴까요?


오호라, 이런 구성의 음식을 백반이라고 하는군. 나는 처음에 백반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런식의 갖춰진 음식을 먹어본지가 언제였던가. 독신은 수박 한 통을 사는 법이 없다.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형편이 그렇다보니 내 냉장고 속도 상해서 버릴 지경에 이른 식재료가 심심찮게 생겼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다보면 장을 보기가 쉽지 않다. 역시 한국사람은 이런 형태의 가정식 백반을 먹고 살아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다.


최근까지 재료가 좀 구체적인 음식들로 끼니를 떼우기 일쑤였다. 가령, 무슨무슨찌개나 무슨무슨탕 혹은 무슨무슨전골. 그러다보니 이 간단한 단어 백반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평범한 백반을 앞에 두고 별생각이 다 났다. 든든한 식사를 마치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솟았다. 나와 자전거는 31번 국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청사포 지나 기장쪽으로 가는 오르막길, 이날 유난히 하늘이 파랬다.


31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대변항에서 빠져나온 해안도로 




대변에서 죽성까지 한적한 바닷가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 길이 좀 짧은 것이 흠이다.




31번 국도 일광에서 월내까지는 비교적 바닷가와 인접한 길이라 실컷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 해송 사이로 멀리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보인다.


돌보지 않은 감나무에는 가을답게 가지가 휠 정도로 많은 열매가 달려있다.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건설현장 입구: 원전과 풍력발전기가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다. 풍력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대외홍보용으로 모양만 그럴 듯하게 만든 듯 보였다.


31번 국도는 말이 국도지 부산에서 울산의 공업단지까지 이어지는 도로여서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해서 나는 틈만 나면 해안도로로 빠져들었다. 서생면을 조금 지나니 오른쪽으로 나사리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나왔다. 핸들을 꺾어 천천히 마을로 접어드니 파도소리, 바람소리, 갈매기 우는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나사리의 아름다운 바다: 맞은편 등대를 지나 길은 간절곶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이런 형태의 벽화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밋밋한 시멘트 담벼락보다는 확실히 보기에 낫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정된 예산 때문인지 벽화의 내용과 재료가 천편일률적이지는 않나 하는 점이다. 


땀을 식히며 한참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도 마을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벽화 구경을 하며 걷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벽화가 있었다. 불을 쬐고 있는 해녀 할머니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얼굴표정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잘 살아나 있었다. 인자하지만 고집이 세 보이는 할머니, 어떤 말을 건네도 웃으며 잘 받아줄 것 같은 할머니, 장난끼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은 채 농담도 곧잘 할 것 같은 할머니.


나사리, 한 번 살아보고픈 마을이다. 자전거에 다시 올라 천천히 해안도로를 달려나가는데 지금까지 달려온 길 중에서 가장 좋은 경치를 던져준 곳이었다.




나사리에서 간절곶으로 가는 길가




목재난간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가 장관이다. 주변에 커피전문점이 많고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간절곶에 도착하면 바다경치도 경치지만 늘 여행자를 먼저 맞이하는 것은 대형 우체통과 이런저런 조형물들이다. 간절곶이 처음은 아닌데도 이곳에만 오면 괜히 마음이 간절해지는 연유를 모르겠다. 동해안 일출을 빨리 볼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런 것일까? 잠잠하던 바다가 어느새 바람이 거칠어졌다. 나들이 나온 아가씨들은 치마단을 붙잡기에 바빴고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수평선에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보니 정작 간절곶에서 일출 구경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잘익은 홍시 같은 불덩어리가 떠오르는 모습을 접하면 가슴속 실낱 같이 미미해져버린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날까?


우체통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바쁜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음속의 작은 소망 한가지를 적어 마음으로 우체통에 투척한 후 다시 길 위에 올랐다. 해가 지기 전에 울산까지 가야 했다.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갔고 먼 데 온산과 울산에서 풍기는 중공업의 냄새가 여행자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간절곶


                            ▲ 간절곶 소망우체통


화학공업회사가 많은 탓에 냄새에 적응이 쉽지 않았던 울산




울산의 랜드마크 공업탑

나의 문화유산답사기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일상다반사



누구나 한 작가의 저작을 오래 읽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기 취향에 맞는 작가가 한 두사람쯤은 있는 법이니까. 내게 있어서 유홍준 교수가 그런 경우다. 지금은 대부분 세월의 변화에 따라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동네 골목골목마다 만화방이 흔했다. 한정된 용돈으로 만화를 보자면 선택에 있어 골머리를 부여잡기 십상이었는데 이 만화 펼치면 이 것이 재미있을 것 같고 저 만화 펼치면 저 게 또 재미있을 것 같아 한참을 망설이기가 일쑤였다. 그러다가 만화방 주인장에게, 공짜로 서서 만화 다 보냐고 지청구를 듣기도 했고.


이 때 재미의 보증수표와도 같은 작가의 이름은 선택을 참 편하게 해준 고마운 것이었다. 전국민이 다 알법한 이현세,허영만,박봉성...


만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유홍준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라는 타이틀은 내게 조금도 주저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만큼 개인적인 취향에 있어 잘 읽히는 책이고 동시에 한 번 잡으면 쉬이 놓지 않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예고했던 내용이지만 그의 이번 신작은 제주에 관한 것이다. 책 한 권에 제주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예의 유홍준 교수의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된 책이다. 한 작가의 글을 되풀이 읽다보면 어느정도 그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이나 취재에서 얻은 정보를 글로 엮어가는 노하우 같은 것이 포착될 때가 있다. 그러다보면 나 스스로도 그 작가의 문장을 흉내 내게 될 때도 있고. 


그런저런 사정이 파악되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매달렸을지 가늠이 된다. 해서 좀 아껴서 야금야금 음식을 저작하듯 정독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올 봄 제주를 떠다니며 눈으로 확인한 풍경들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데면데면 그냥 스쳐 지나갔던 곳의 숨겨진 사연들을 책을 통해 알게 되면서 떠나온 여행지가 다시 그리워진다. 전작에 비해 사진이 비교적 많이 실렸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을 글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었을 것이다. 장담하건데 이 책을 읽고 떠나는 제주여행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한층 풍성한 경험을 여행자에게 던져줄 것이다.


올 가을엔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제주를 찾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