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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일상다반사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타려고 커피포트의 전원을 올리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먹통이 되어버리는 거였다. 일진이 안좋은 날이겠거니 짧은 한숨을 한차례 내뱉은 그는 가스레인지로 손길을 옮겼다. 작은 주전자를 올리고 불꽃을 댕기려 레버를 돌리는데 날카로운 기계음만 날 뿐 가스레인지 조차 반응이 없었다. 


불꽃을 일으켜주는 작은 부속이 이물질로 오염되어 있어서 더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였다. 


- 하긴…… 두놈 다 햇수로 8년이 지났으니 문제가 생길만도 하지.


빈속에 타먹는 인스턴트 아침 커피를 거르니 괜히 성질이 나는 그였다. 세월에 굴복한 하찮고도 허섭한 세간살이들을 둘러보던 그는 문득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굽혀지지 않고 쉬이 피로해지며 피가 통하지 않는지 자주 경련이 일어나는 그의 오른발이 영판 오늘의 세간살이를 닮은 거 같아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괜히 속으로 찔끔거려보는 그였다.


이틀 전의 일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단골 통닭집에 들른 그는 한참 닭 튀기기에 바쁜 여사장의 간을 보았더랬다.


- 저기, 사장님. 제가 쿠폰이 열장 모였거든요. 가지고 오면 맥주 한 병 주실 수 있나요?


- 무슨! 열장이면 닭은 공짜고 술값만 계산하면 돼.


오! 예……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에도 이런 수준의 요령밖에 부릴줄 모르는 그는 천상 낯선 곳에선 밥 못얻어먹을 성품의 소유자였다. 빈속을 쓰리게 하는 아침 인스턴트 커피를 못끓여 먹은 탓에 괜히 허전하고 불안해서 한쪽 다리를 덜덜 떨던 그가 전화기를 냅다 들었다. 전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그는 호기롭게 외쳤다.


- 상오, 닭한마리값이 생겼으니 저녁에 봅시다. 늘 먹던, 옆 가게 커피값은 당신이 들고오시오.


세월이 지나 몸에 기능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옆에 있는 친구가 이제 끝까지 갈 친구지. 그 친구를 살뜰히 챙겨야겠다고 괜히 용을 쓰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 거였다.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서먹서먹 하였다.
자전거탄풍경


익숙한 풍경을 뒤로 하고 자전거의 방향을 산으로 돌렸다. 계절은 이미 성급한 여름기운이 죽자고 덤비는 날이어서 짧은 시간 달렸지만 이내 등에 땀이 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을 오르는데 버스 정류장 근처 난장 한 귀퉁이에 눈길을 끄는 풍경이 있었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이 수레에 쌓여있는 폐지를 한장 한장 들추어서는 종이 위에다 페트병의 물을 슬쩍슬쩍 붓고 있었다. 한장 한장 꼼꼼하게. 


나는 어쩌자고 이런 숨찬 순간에 흘려버려도 될 민망한 상황이 자주 동공에 포착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되도록 거짓없는 모국어로 표현하자면.


[노인은 폐지를 한장 들어올리고 그 위에 페트병의 물을 찌끄리고 다시 그 밑에 폐지를 들어올려 다시 그 위에다 물을 찌그리고 있었다.]


그렇지... 찌끄리고 있다는 문장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탄 내 어깨가 그 노인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영악한 나의 뇌는 그 노인의 형편을 재빠르게 훑고 있었다. 폐지는 무게에 따라 돈으로 바뀌어지는 형편이어서 그 사이 사이로 물을 먹여 무게를 늘이고 있는 거겠지. 혼자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래서인지 노인의 얼굴은 일이 사람에게 은밀히 던져주는 웃음이 없었다. 


입바른 소리로 뭐라 타박하거나 값싼 이해를 구할 수도 없는 날것 그대로인 도회의 삶이었다. 노인과 내가 이해당사자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에 내가 그 폐지를 매입하여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폐지가 품고 있는 수분은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나? 물은 생명과도 같은데 어느 시공간에 처하였느냐에 따라 거세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이 그런데 하물며 사람의 삶은 어느 지경까지 누추해질 수 있을지. 


뇌속이 복잡하였다.


오랜만에 자전거로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데 일체의 풍경이 서먹서먹하였다.









꽃소식
일상다반사

지금 이곳은 꽃이 제색깔을 찾아가느라 바쁘기가 말도 못해요. 


그곳은 여기보다 더하겠지요? 


작년에 그곳에서 보았던 동백꽃이 그리워 목이 쉴 지경입니다.


동백이건 벚꽃이건 조만간 다시 찾을 터이니 쉬어빠지지 말고 남아있으라 전해주세요.






입춘대길, 건양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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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대길, 건양다경(建陽多慶)...


동네 골목에 복을 비는 듯한, 아니면 액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이기도 한 듯한 기원이, 주술이 을씨년스럽게 내팽겨쳐져 있었다. 쌍으로 만든 모습이 다정하면서도 누운 자리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어서 괜히 처연해보였다.


건양다경... 봄의 따스한 기운이 감도니 경사로운 일이 많으리라.


아마도 사람만이 봄의 따스한 기운 정도만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유일한 포유류겠지. 나또한 그렇다. 갈대를 줒어 집으로 갔다. 지금은 먼 대륙에서 흘러온 흙먼지 냄새가 가득한 도회의 밤. 하늘은 비를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몰래 갈대로 인형을 만들고 있다.


기원과 주술이 손끝에서 간당거리고 있는 밤이다.

 


상전벽해, 수영만
자전거탄풍경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바다로 바뀐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변화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사람도 그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부산에서 상전벽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곳 수영만 근처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뽕나무나 바다 대신 흙먼지 풀풀 날리던 곳에 마천루가 들어섰다는 것 정도. 


건물이 들어선 곳 대부분은 예전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 흐르던 곳이었다. 매립을 통해 이 넓은 땅이 새로 생긴 것이다. 지하철이 아직이었던 시절엔 버스로 한시간은 예사로 걸리던 부산의 변두리였는데 요즘은 이 근처에 산다면 제법 방귀 꽤나 뀌고 사는 축에 든다는 대접을 받는다.



정비된 강변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다보면 한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뉴욕 맨해턴의 분위기가 대체로 이렇지 않겠나, 하는 착각에 빠진다. 해운대와 광안리가 지척이고 주거환경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탓에 경제적인 부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살기에 썩 괜찮은 공간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나에겐 이제 이 주변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멀리 영화의전당 건물과 세계적(?) 규모의 쇼핑센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욕심이 있다면 이 풍경속에 자랑할만한 세계적 규모의 도서관도 하나쯤 있었으면 싶다.



먼 바다 대양에서 예리하지 않은 바람이 불어왔다. 아! 모처럼 부산다운 날씨다. 모름지기 부산의 겨울은 요며칠처럼 선선한 정도여야 정상이다. 고개를 들어 먼데 겨울하늘을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은 하늘뿐이었다. 그런 하늘이 오늘은 전혀 지겹지 않았고 되려 반가웠다. 나도 누군가에게 겨울오후의 하늘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보고싶어서 언젠가는 한번쯤 다시 찾게 되는 그런…….







배송곳니
일상다반사

이렇게 치료 받고 나면 보철한 이의 수명은 어떻게 되나요?


솜뭉치를 입에 물고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은 입으로 치과 간호사에게 나는 그렇게 물었다.


반영구적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심드렁한 표정의 간호사가 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내심 기뻤다. 한번의 투자로 그렇게 길게 효과가 지속되다니. 치과라면 질색을 하던 내가 삼분의 이 이상 썩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배송곳니를 이른바 덮어씌우게 되기 까지는 당시 갓 좋아하게 되었던 S라는 여성 때문이었다. 웃으면 충치가 드러나게 되니 입을 다물고 굳은 인상으로 있거나, 불가피하게 웃게 될 때는 손으로 입을 가리던 것을 그 여자애가 싫어했기 때문에 더는 치료를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공간이 넓어 혀끝이 들락날락하던 곳게 제대로 보철이 덧씌워지게 되니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고 틈만 나면 신기해서 거울에 비춰보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그 횟수만큼 당시엔 S를 일상에서 자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적 빠진 유치는 지붕위로 던져버리고 새로 영구치가 생긴 것 만큼이나 내 일상에 S가 자리잡게 된 것이 기뻤었다.


S 덕분에 얻은 그 인공의 배송곳니를 사용한지도 햇수로 십삼년이 되었다. 아직까진 전혀 이상이 없으니 정말 반영구적으로 버텨줄 것도 같다. 동시에 잊고 살았던 S가 생각이 났다. 멀어질 땐 보고싶으면 어떡하나, 보고싶어서 죽을지도 모를 것 같더니 역시 한 십년이 지나니 마음의 상처도 무덤덤해지고 얼굴마저 흐릿하게만 떠오를 뿐이다. 다 늙어 주책이라고 할지라도 문득 떠오르는 옛기억을 막을 수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배송곳니가 영구적으로 버텨주는 한 나는 때때로 그녀를 문득 떠올릴 것이다. 이 형국은 어쩐지 내가 좀 손해를 보는 것 같다. 아마도 그녀는 살아가면서 나를 떠올릴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반지나 목걸이 따위를 선물하지 말고 성형수술이나 해줄 것을 그랬나? 화장할 때마다 생각나게. ……. 누군가에게서 잊혀진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혀끝으로 배송곳니의 주변을 더듬으며 다시 추억에 잠겨 보는데. 

앗!

혓바늘이 돋아 버렸네! 젠장.


낙동강 맥도생태공원의 가시연

31일
일상다반사

어른들은 저 나이가 되면 무섭지도 않나?


한참 어릴 때 윗풍 센 방안 윗목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10대가요제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고기냄새 배인 코트를 벗어 어머니에게 건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여차하면 손목이 헤지고 무릎 나온 내복 바람으로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판이기 때문이었다. 술이 모자랐는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술상을 따로 차리게 하여 젓가락 장단까지 곁들이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아버지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당시엔 평균수명이 60대였으므로 아버지는 명백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적어보였다. 어린 녀석이 별생각을 다하고 살았는데, 나는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면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 살아가나 싶었다. 아버지는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저렇게 술을 많이 드시나? 가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올 해의 마지막 날 31일이다.


꼽아보니 내가 그 때 그 날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 따위가 두렵지 않다. 지레짐작으로 아주 두려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더디 갔으면 하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이로 따지자면 몸은 이제 더 나빠질 일만 남은 셈이다. 다만 그점이 유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몸에 병이 생겨 모르는 이들에게 원하지 않는 신세를 지지나 않을까, 그게 오히려 두렵다.


새해부턴 몸이라도 제대로 건사해야겠다. 불끈!


31일. 차고도 메마른 겨울바람이 분다. 바람의 형편이 그러하니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덩달아 건조해진다. 영혼마저 바싹 말라 누가 툭 건드리면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겨울의 대기속으로 흩어질 것만 같은 날이다. 


해피 뉴 이어.

혼자 고기를 구워서 먹는 일
일상다반사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의 순위를 매긴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이 가격보다 더 저렴한 곳이 있을까, 싶은 싸구려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싼 상추쌈을 입으로 가져가며 상오가 한 말이었다. 원산지가 의심스러운 삼겹살을 뒤집으며 눈빛으로만 그게 어떤 건데? 하고 나는 물었다. 


혼자서 영화 보기, 혼자서 밥 먹기…… 영화는 혼자 보기가 습관이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집에서도 아니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기란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었다. 난 혼자 식당에서 곧잘 밥을 먹는데, 얼마전에는 이 삼겹살집에서 혼자 고기도 구워먹었다구.


상오의 입이 벌어졌다. 저작되다 만 음식물이 보였다. 역시 강적이시군요. 혼자서 하기 제일 힘든 일이 이런 식당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서 먹는 일이라더군요. 뻘쭘해서 죽을 수도 있대요. 상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먹는 일에 열중했다. 불판에 잘 구워진 김치가 요즘 입맛을 당기는 음식이다. 뱃속이 어떻게 된 일인지 영 꼬여있다가도 이 단순한 음식을 먹고 나면 다시 편안해지니 주기적으로 찾지 않을 수 없다. 서해를 건너온 김치의 속살이 유난히 희었다. 신선해 보이라고 무슨 약품을 친다는 풍문이다.


형님 대접한답시고 상오가 집게와 가위를 들고 고기를 굽고 자르는데, 그 손놀림이 영 서툴다. 아이씨, 저는 이따위 기능적인 부분에서도 남들에 비해 뒤떨어져요. 이러다간 영락없이 독거노인 신세로 전락할 것 같아요. 


습관이야. 습관. 자주 하다보면 요령이 붙지. 나는 집게와 가위를 낚아채서 시범을 보였다. 그렇지…… 습관. 이렇게 상오와 같이 고기를 구워먹다가 다시 혼자서 먹는 날이면 제법 힘들어지겠지. 투덜거리며 소주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상오를 잠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속으로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언제나 좋은 형이 되고 싶단다.



부산... 첫눈.
일상다반사

자주 가는 단골 슈퍼마켓 주인장에게 올 가을 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겨울엔 제작년처럼 눈구경 한 번 제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인장은 손사래에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아유…… 눈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태백이었다. 평생 살아도 부산에서 눈구경하기란 말 그대로 가뭄에 콩나듯 했던 나와는 눈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것도 기후변화 때문인지 제작년에는 눈이 제대로 내렸다. 한 이틀 부산이라는 도시가 온통 마비가 될 정도로.



어떤 이들은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느니 도시기능의 마비가 어쩌고 하면서 걱정들이 많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좋았다. 다들 어디론가로 향한 움직임을 멈추고 하얗고 고립된 세계 안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모습들이 그리고 그 느리디 느린 시간의 흐름들이.


수상한 기척이 있어 내다보았더니 바깥은 그때처럼 한참 설국이 진행중이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얗고 고립된 세계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눈이 떨어지는 속도는 초속 십오센티미터 정도.


한 이틀 계속 이랬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