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에 해당되는 글 14건
벚꽃엔딩... 경주.
자전거탄풍경

원인도 모르는 근육통과 현기증에 삼일을 앓고 있었더니 봄날의 벚꽃이 더욱 간절하였다. 바람에 실려 문틈으로 들어온 꽃잎을 보고 있자니 조바심이 더해져 없던 마음의 병까지 나고야 말았다.


저 꽃을 보아야 하는데…… 다 지기 전에 보아야 하는데…….


성도 나고 집중이 안되니 나는 미친사람마냥 두뺨을 양손으로 후려 갈겨보기도 하고 근육통으로 온전치 못한 육신의 여기저기를 주먹으로 두들겨보기도 하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팔짝팔짝 뛰기에 이르렀다.


떨어져라! 떨어져! 귀신같이 들러붙어 있는 통증아 사라져라!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병증이 조금 호전의 기미가 보이자 나는 부리나케 짐을 싸서 자전거에 올랐다. 가까운 곳의 꽃은 이미 감흥을 잃은지 오래고 조금이라도 북으로 가면 나을 것 같아 정처로 삼은 곳은 경주.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곳에서 익명성이 선물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어슬렁거렸다. 그것도 잠시, 골목 한구석에도 대릉원 긴담 너머 어느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도 그리고 박물관 마당 큰종 옆에도 10년전 20년전 30년전의 내가 오늘의 나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 모든 나날들에 하나하나 눈인사를 하고 나니 한바탕 거친바람이 꽃나무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아, 꽃잎들이 폭설처럼 사선으로 떨어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나의 추억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꽃잎들의 행방을 열심히 좇았으나 얼마 못가 지치곤 하였다. 호된 봄날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1100고지를 넘어
자전거탄풍경



봄에 오르려 하다 그만 둔 길을 다시 나섰다. 항구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지방도 1139 이른바 1100도로위에 자전거를 올리고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다. 11월 늦가을 한라산 가는 길의 날씨는 오르막에선 땀을 쏟게 하더니 길의 끝에 마침내 당도하자 손끝을 얼릴 기세였다.


날이 내내 흐리다가 여행자가 길의 정점에 당도하니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스스로의 본모습을  설핏 열어주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싶어서 상고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차갑게 얼어버린 편의점 김밥을 급하게 먹었다. 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래 걸을 수 없는 몸이다. 해서 둥근 형태를 띈 발, 자전거의 신세를 아니질 수 없는데 자전거는 좁고도 긴 돌밭을 관통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았다.


불러도 불러도 질리지 않는 그 이름 산록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한라산의 상고대가 떠올라 못내 아쉬웠다. 11월은 아직 반나마 남았고 두발이 건강한 이는 가을이 먼길을 떠나기 전에 한라산을 오를 일이다.





중산간의 길을 달리다 보면 해안도로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이 해안도로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산록도로를 따라 다녀볼 것을 권한다. 접근은 힘들지만 일단 높은 곳에 자전거를 올려놓으면 시간도 단축되고 여차하면 원하는 지점으로 곧장 내려쏠 수 있어서 마음이 쫒기지 않아서 좋다.


오전과는 달리 점심을 지나자 하늘은 가을의 전형이었고 갈대와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선선한 바람의 도움에 힘입어 자전거여행자는 첫날 제주의 서부와 남부건너뛰어 산록도로를 따라 성산포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힘들고 긴 길의 끝자락 성산의 숙소 근처 고깃집에서 근래 가장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먹는 요령을 몰라 늘 태워서 먹던 돼지고기를 이제 몇번 경험이 쌓였다고 알맞게 익은 상태에서 낼름낼름 입으로 가져갔다. 한라산 소주 한잔을 들이켜고 감격에 젖어 있으니 근육과 관절에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통증이 스쳐지나간다.


제주가 좋았다.









다음날, 중산간 위주의 여행을 계획했으나 그래도 싶어서 들른 우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물론 여기저기 폭탄이 떨어지고 파편이 튄듯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어 을씨년스럽기도 하였으나 섬이 지닌 풍경의 기본이 워낙 독보적이다보니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부디, 하는 마음을 섬에 남겨두고 여행자는 다시 산길로 곧장 자전거를 몰았다.



용눈이 오름에서 뭉기적거리는 바람에 다랑쉬 오름 입구에 도착하자 해는 이미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 네다섯시만 되어도 중산간의 날은 빠르게 어두워진다. 다랑쉬 오름은 다음으로 미루고 맛보기 삼아 오른 아끈다랑쉬 오름에서 나는 주체 못할 황홀에 빠져들었다.


억새와 바람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산 영혼이 제멋대로 뒤섞여 한바탕 군무를 펼치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이제 자전거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목포는...
자전거탄풍경

목포는 나에게 제주로 가는 경유지였다. 처음엔 단순히 경유지였으나 목포에게서 받은 인상은 오히려 제주 이상으로 좋았다. 마치 메인매뉴보다는 주변에 딸려 나온 곁다리 반찬에 더 입맛이 당겨 젓가락질이 잦아진 경우처럼 자전거를 타고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맛이 몹시 좋았다.


목포는 초행길이었다.


부산에서 왔다,하니 중년의 공무원은 가던 길도 되돌려서 찾아헤매던 숙소의 문앞까지 나를 안내해주었다. 시내 한가운데에 이런 멋스러운 숙소가 자리잡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례 한적한 외곽에 있겠거니 주변만 빙빙 돌았던 거였다. 요령 없기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어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으나, 덕분에 남도사람의 따뜻한 정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크게 손해 본 일은 아니었다.



여그가 서울로 치자면 명동인 택이제, 하고 공무원이 말했다. 자기 고향에 자부심이 없다면 토박이라 하겠나. 정돈된 시가지 사이로 오후의 적당히 예열된 햇볕이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명동보다 여가 더 낫네예, 했더니 타이 없는 흰색 셔츠의 공무원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웃었다. 


목포의 미소였다.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아침 배편 예약을 마쳐도 시간은 많았다. 목포항 관광안내소 부스에서 지도 한장을 얻어 눈길을 끄는 곳을 찾았다. 목포엔 대한제국 때의 일본영사관과 일제강점기 때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남아 있었다. 당시 목포의 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면서도 괜히 시간의 흐름이 더디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요즘은 자전거로 다니는 삶의 속도와 주변을 바라보는 눈높이에 대해 몹시 만족하며 살아간다. 내가 자동차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목포를 경유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또 이날의 목포는 내 생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에 맞는 속도와 눈높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이 힘이 들 뿐.



아름다운 건물이 보였다.


칼 찬 그들은 바다를 막아 반듯하고도 넓직한 길을 내고 길의 시작점에 그들의 영사관을 지었다. 그 앞마당을 기점으로 국도 1호와 2호가 시작되는 도로원표가 우뚝 서있다. 국도 1호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2호는 목포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영사관의 칼 찬 주인들이 빨간벽돌 건물 안에서 신의주와 부산을 꿈꾸었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였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939키로미터... 


아득하였다.



나즈막하고 고만고만한 가옥들 사이에 유난히 우뚝한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었다. 휴관일이라 건물 내부로 들어가 보지 못해서 섭섭하였다. 당시 8곳에 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소작료를 가장 많이 거둬들인 지점이라고 하니 건물의 규모가 저절로 수긍이 갔다. 


건물은 곳곳에 일본을 상징하는 문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랐다.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작은 문은 열려 있고 빨간 벽돌 건물 너머로 새털 같은 구름이 목포의 오후를 꾸며주고 있었다. 영사관 건물 주변을 한바퀴 휘익 둘러본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케노피 아래 그늘에서 혼자 놀았다. 담배를 끊었는데 이런 순간처럼 혼자 놀기 몹시 심심할 때면 담배맛을 다시 느낄 수 있었으면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담배연기를 이제 몸이 기억하지 못하니 심심함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벌떡 일어나 멀리 그들이 닦아놓은 영사관 앞 본정통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새로 도청이 들어서면서 항구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은 경기가 말이 아니란다. 목포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이 좀 더 빠르게 시간이 흘렀으면, 하고 바란다는 풍문이었다.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이 지독한 더딤,정체가 좋았다. 


내 모습과 흡사하여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오, 제주.
자전거탄풍경


오, 제주.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내렸을 때 나는 늘 그랬듯이 오, 제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어? 제주... 하다가 그래, 제주! 하고는 종국엔 음... 제주...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허겁지겁 제주를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배 안에서 섬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제주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정말 제주에서 딱 한달만 살면 그리움이 사라질까.


섬에 내리면 곧장 천백도로를 횡단하고 내처 중산간의 모세혈관과도 흡사한 좁은 길을 떠돌아다녀야지 했던 초심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는 익숙한 그 예전의 길을 답습하고야 말았다.


입으로 이정표의 지명을 씨부렁거려보면 괜히 정겹고도 흥이나는 애월애월 한림한림 모슬모슬 난드르난드르, 를 달리다가 예의 자전거를 탄 동행을 만나 같은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엇비슷한 스토리의 사연을 축적하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한결같기도 힘든 일이지만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한결같기가 힘든 일이었다. 제주는 늘 그랬듯이 그냥 그대로의 제주였을 뿐이었는데 다시 찾은 나는 그 예전의 내가 아니었던 거였다. 나는 무슨 의무라도 있는 사람인 것마냥 길에서 만난 인연들을 꽁꽁 용을 쓰며 한사람도 흘려버리지 않고 챙기고는 우도까지 바래다 주고 성산에서 오렌지호를 홀로 탔다. 


때는 수학여행 시즌이어서 그 큰 배가 예약으로 빈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제주가 알면 섭섭할 일이지만 막상 자리가 없다고 하니 왜 또 그렇게 빨리 벗어나고 싶던지... 대기순번을 받고 기다리니 다행히(?) 빈자리가 났다고 매표소 직원이 표를 주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배에 올라 출렁이는 자리에 앉았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이어서 자전거여행은 지속될 수 없었다. 둘러대기 좋은 핑계도 있었던 셈이다.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었는데, 막상 배가 섬에서 멀어지자 나는 어쩌자고 저 섬이 다시 그리워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우니 언젠가 또 갈거다.


섬이 희미해질 때였다. 힘든 길을 완주한 서로를 대견해하며 성산의 돼지고기집에서 같이 소주잔을 기울였던 어린 여자애의 독백이 떠올랐다.


- 아저씨... 이마가 뜨끈뜨끈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요.


제주는 처음 찾은 이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녀는 끝내 눈물 지었다.


다행히 나는 처음이 아니었다.























길따라...
카테고리 없음



여행지의 숙소에서 이른바 여행전문가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살고 싶은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련의 행위라고 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라? 나랑 같네.


길따라 가다보니 강이 나왔다. 숨죽이며 고요한 강, 먼지 풀풀 날리던 강, 은밀하게 표정을 감추고는 나를 훔쳐보던 강, 여러가지 강의 표정과 맞닥뜨렸지만 왠지 풍경은 마음으로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다. 끝없이 하게 되는 질문.


나는 저 강어귀 어느 한적한 곳에서 홀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까?


풍경은 죄가 없는데 나는 선뜻 강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한없이 고요한 강의 구비구비마다 불가해한 인내심의 소유자들이 오래 전 그날부터 살아오고 있었다. 나로선 엄두가 안나는데, 하다가도 다시 용기를 가져본다. 


하긴 장소 따위가 대수던가. 내가 그곳을 받아들이고 녹아들어갈 마음이 안생기는 상태면 아무리 좋다는 곳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겹지만 필시 이것도 운명이었다.















서울견문록8 하늘공원
카테고리 없음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인연들과 모처럼 주말을 이용해 자전거 타기에 나섰다. 행주산성을 거쳐 점심은 그 유명하다는 원조국수집에서 먹었다. 맛은 모르겠고 엄청나게 많은 양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점심이었다. 시간이 남아 하늘공원으로 자전거의 방향을 틀었다. 오르막을 오르기 전 자전거 공원에서 바라다보이는 한강의 윤슬이 지나온 시간을 되새겨보게 만들었다. 


강물처럼 나도 어쨌든 어디론가 흘러가겠지. 


이 한강의 풍경과 이후 올라갈 하늘공원이 이번 서울행의 마지막 볼거리일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쉬움 반 홀가분 반이다. 처음 마음이야 오랜만에 상경했으니 느긋하게 이곳 저곳 들르고 싶은 곳도 많았지만 빡빡한 교육일정에 숙소에 들어가면 피곤해서 드러눕기에 바빴던 나날이었다. 막상 교육이 끝나니 그저 빨리 집에 가서 익숙한 내 방안에서 쉬고 싶었다. 이제 나도 집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울 나이가 된 것이었다.


교육은 아무리 받아도 미진한 것. 어떻게 보면 어떤 일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자격이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는 일일 것이다. 그 나머지는 내가 헤쳐나가면서 익혀야 할 일. 


잡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하늘공원쪽으로 돌렸다.



부자연스럽고 뜬금없는 선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거기가 하늘공원이란다. 거대도시 서울의 모든 잡동사니 허섭쓰레기들이 쌓여서 악취를 풍기고 있던 곳이었단다.


지금이야 쓰레기를 분리수거도 하고 소각과 매립을 나누어서 한다지만 이 쓰레기의 큰 산이 이뤄질 적에는 그저 파뭍고 쌓기에 바빴던 시절이었다. 저렇게 쌓이기만 하면 어쩌나 하던 곳이 공원이 되었다니…… 사람들은 이곳에는 풀한포기도 자라지 못할 거라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러던 곳이 이렇게 변했다.


자연의 힘은 도대체 어느정도까지일지 가늠 조차 쉽게 안된다.



동생뻘 되는 아이가 말했다.


- 형님, 저기 맞은 편 아파트는 아직까지 이곳 때문에 아파트값이 잘 안오른대요.


하긴 이렇게 대규모로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면 아무리 큰 강을 끼고 있더라도 맞은편까지 영향이 없을 수 있었겠나 싶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데크에 나란히 서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들의 미래가 이곳처럼 훗날 더 나아진 모습이었으면, 하고 나는 바랐다. 그리고 여전히 친해지지 않는 서울에 작별을 고했다. 


서울, 안녕.




억새가 한창인 하늘공원


매립지 내부에서 발생하는 가스는 에너지로 사용된다고 한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전망대에서 바라다보이는 한강의 풍경이 아름답다.







서울견문록7 종묘
자전거탄풍경

만약 종묘를 이십대 시절에 들렀더라면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어릴적에는 입에도 못대던 음식의 깊은 맛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창덕궁에서 큰 길을 하나 건너니 종묘가 지척에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면서 종묘 역시 관람객의 출입이 일정수준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관람객 숫자 이내에서 문화해설사의 인솔에 따라야만 관람이 가능했다.


이를 두고 관람객과 시설관리를 맡고 있는 측에서 심심찮게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내돈 내고 내가 보는데 무슨 해설 따위가 필요하냐. 이러쿵 저러쿵. 그도 그럴것이 시간을 잘못맞추면 한시간 이상을 바깥에서 기다려야 하니 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표도 예매한 시간에 정확하게 들어가야 하는 세상이다. 


나의 경우도 이런 규칙이 처음엔 낯설어서 잠시 망설였다. 앞의 차례는 이미 정원이 차버렸고 다음은 외국인이 출입하는 순서여서 한시간 반 이상을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발길을 되돌리려 하다가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다시 오겠나 싶어서 기다리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님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따라서 왕조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례가 행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죽은이들을 기리는 곳 근처의 종묘공원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괜히 기분이 묘해지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내 성격이 이렇게 여럿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낯선이들과 섞인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못견뎌 하는 터라 그랬을 것이다.


공원의 어르신들은 대선후보에게 쌍욕을 하기도 하였고 거의 대부분은 장기와 바둑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몇몇은 삼삼오오 모여서 한시를 적은 후 크게 읽으며 뜻을 풀이하기도 하였다.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일로 소일하고 있을지가 사뭇 궁금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사고하는 능력과 지식을 흡수하는 방식에서 만큼은 좀 유연한 상태로 늙었으면 하고 나는 바랐다.


서울에서 잔술값과 이발비가 가장 저렴한 곳이 종묘공원 이곳 아닐까, 싶었다.


깊이는 느낄 수 없지만 나름 멋을 부린 글씨들, 종묘공원 어르신들의 길바닥 작품이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로 입장을 하자 문화해설사의 자기소개와 종묘에 관한 역사해설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다들 투덜투덜에 심드렁하게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점점 해설의 깊이가 깊어지자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귀를 쫑긋하고 집중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런저런 질문까지 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자, 이러니 해설 없이 종묘를 한 번 쓱 훑고 나오는 일은 관람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다. 종묘가 처음인 사람이라면 되도록 자유관람이 허용되는 토요일보다 다른 날을 잡아 해설을 들으며 관람하는 것이 더욱 뜻깊은 일일 것이다.




좌우로 임금님과 세자가 걷고 가운데는 돌아가신 역대 임금님이 신의 위치가 되어 걷는 길이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종묘의 건축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되도록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삼가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조상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치장이 의미가 없고 되려 잡스럽게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되도록 엄숙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물은 물론 연못이나 박석에도 별다른 꾸밈이 없는 것이 다른 궁궐건축과의 차이라고 했다. 동시에 다른 궁궐 건물의 입구마다 있는 현판도 없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신을 위한 공간이므로 일체의 언어마저 의미가 없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은 사람들이 길을 잊어먹지 않게 하거나 제대로 위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슨문, 무슨각, 하고 이름을 써서 붙이는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신의 영역에서는 이 조차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듣고보니 모든 건물엔 일체의 글씨가 없었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제례에 쓰일 음식을 만들던 공간, 전사청



정전에 들어서니 그제서야 단체관람이 아니었다면 약간 색다른 느낌의 종묘를 느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건축물이 이렇게 간단명료할 수도 있다니, 하는 놀라움도 들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해설사의 설명이 귀에 잘 안들어왔던 것 같다.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셔터를 누르기 바빴는데 지금 확인하니 실제 종묘의 분위기가 제대로 반영된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너른 마당 앞에서 악사들이 종묘제례악을 연주하고 있고 임금님이 엎드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유교라는 새 방식의 건국이념을 이보다 더 강하게 뭇백성들에게 어필하는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방식이야 조선왕조 이전에도 어찌 없었겠나, 그러나 이를 새롭게 제도화하고 형식화하여 국가의 근간인 이념적인 틀로 만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금님이 당신의 부모와 할아버지를 정성으로 받드는 것과 같이 백성들이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 줄 것을 새 왕조의 임금님은 바랐을 것이다.


왕조의 바람은 결국 영원할 수 없었고 종묘만 남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오늘날에도 매년 제례는 벌어지고 있는데 임금님을 대신하여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추천한 일인과 역대 왕후를 배출한 집안에서 추천한 여성 일인이 절을 올린다고 한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예전 법도에는 여성은 제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변화를 뛰어넘는 것은 왕조는 물론이고 유교나 유교전통을 바라보는 우리 의식의 변화일 것이다. 문득 사람의 일이 작고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과 변화의 흐름속에서 사람은 잊혀지기 쉬운 것이겠지…….


종묘를 빠져나오며 다시 한 번 정전쪽을 돌아보았다. 요즘 괜히 뒤돌아보는 일이 잦다. 


나이 탓인가 보다.


왕의 신주를 모신 곳이라 규모가 크다.


정형화되지 않은 박석의 배치가 오히려 눈이 덜 피곤했다.










오년상이 끝나면 위패가 이 길을 따라 올라 종묘에 자리를 잡게된다.



서울견문록6 낙선재
자전거탄풍경

하마터면 창덕궁 구경이 후원과 창경궁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끝날 뻔했다. 후원은 관람객들로 이미 예약이 만료된 상태여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그 아쉬움을 미리 대비라도 한 것처럼 낙선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우리 궁궐에 낙선재와 같은 공간이 없었더라면 그 멋이 덜했을 것 같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전각도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생활의 냄새가 덜한 공간이다보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수가 없다. 선뜻 다가서기 좋은 공간은 오히려 낙선재와 같은 곳이다. 댓돌에 발을 올리고 툇마루에 앉으면 앉은키에 높이가 딱맞아 몸이 편안했고 시선을 위로 올리니 네모난 하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우리 한옥의 멋을 살린 건축물이다보니 시선이 가는 곳은 어디라도 예사로 보이지 않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에 건물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일은 몹시 신산한 곳이 낙선재이다.



고종과 순종이 이곳에 기거한 것은 물론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친족들이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채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황태자이자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삶 자체가 왜곡으로 강제되었던 영친왕 이은과 황태자비인 이방자, 일본명 나시모토 마사코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도 마찬가지.


조선왕조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자기나라 일왕은 그렇게 떠받들기 바쁜 자들이 조선왕조와 그 일가에 가한 위해는 글로 다 옮기지 못할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낙선재는 그들의 일을 빠짐없이 목도하였을 터인데 2012년 가을엔 그 어떠한 기미도 없이 주변이 한가롭기만 하였다.


자전거의 핸들을 종묘로 꺾었다.


낙선재의 색은 강렬하지 않고 연한 파스텔톤이어서 일반적인 궁궐과 구분된다.




툇마루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애기나인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 것 같다.







서울견문록5 창덕궁
자전거탄풍경

경복궁 건너뛰고 창덕궁이라니 따지고 보면 좀 앞뒤가 안맞는 일이다. 그러나 태생이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경복궁은 괜히 꺼려져서 다음을 기약하고 창덕궁을 찾았다. 사실은 이번 나들이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종묘이다. 종묘 가는 길에 창덕궁이 있어 그냥저냥 들르게 되었다. 


궁궐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그 규모가 몹시 큰 곳이었다. 다른 나라의 문화재보다 물리적인 크기는 작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궁궐을 거닐다보면 과장이나 요란한 치장이 없어서 좋다. 필요에 따라 짓고 가끔은 소박하면서도 나름의 멋은 또 나름대로 부리고 있는 간결한 맛이 있어서 좋다.




궁궐 지붕 다소 밋밋할 수도 있는 공간에 어처구니가 자리잡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인정전 가는 길



인정문을 지나니 조선왕조의 위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인정전과 품계석이 나타났다. 난리통에 임금이 피난을 가기도 했고 이 앞에서 잔치와 과거가 치뤄지기도 했다. 왜란과 여러차례의 화재, 그리고 갖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자리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이날의 인정전 앞 큰 마당엔 가을 햇볕만이 평화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인정전 내부






화려한 팔작지붕의 인정전




화려한 색상이 눈길을 끈다.


드므라는 명칭이 독특했던 방화수 용기.


이런 구석진 곳에서 신하들과 궐내 나인들이 밀담을 나누었을 듯.



창덕궁 후원은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라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이 쉽지 않다. 정해진 숫자의 관람객만 입장을 허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주말에는 더더욱 관람이 쉽지 않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궁궐을 빠져나오는데 흐르는 물마저 잡스럽지 않게 다스리려 했던 왕조의 이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뜻만은 기억할 만하였다.



서울견문록4 시청과 광화문
자전거탄풍경

자전거 타기가 일상사가 된지 꽤 오래된 나에게도 서울의 번잡한 시가지를 관통하기란 쉽지 않았다. 상업밀집지역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은 그래도 비교적 자전거도로가 정비되어 있어서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시청에 가까워질수록 교통체계도 그렇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량의 흐름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한 때 강남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었다. 거기 지인이 한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간다고. 당시 내 입장에선 서울에서 특정지역을 별도로 구분하여 시내라고 부르는 것이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강남 사람인 그에게서 시내란 시청을 중심으로한 종로, 명동 그 근방이 시내였던 것이다. 당시엔 한참 번화해지고 있고 화려한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 강남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들은 풍월이 생기니 역시 서울을 대표하는 표정은 시청과 광화문 일대가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교육기관의 원장이 휴일 뭐할거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 오랜만에 서울 왔으니 시내구경이나 해야죠.


- 시내? 강남?


- 아뇨. 시청 근처 들렀다가 종묘에 가볼까 해요.


내 대답에 골수 서울시민인 그의 표정이 살짝 당황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참 많이 변한 서울시청 앞



용산을 지나 숙대앞을 지났다. 서울역을 지나 시청에 다다르니 내 기억엔 서울의 풍경 중 가장 많은 변화가 있는 곳은 바로 이 근처가 아닌가 싶었다. 좋은 뜻으로 예전에 비해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이었다. 그 예전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곳은 자전거로 다니는 것이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심심찮게 자전거라이더들이 눈에 띄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서울의 특별한 시민들이 이 광장을 소유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지금도 감지덕지지만 개인적인 생각엔 길이를 줄이더라도 좌우에 차량을 다른쪽으로 우회하게 하고 나무를 심어 녹색공간을 늘였더라면 더 금상첨화가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에 접어들자 자전거에서 내려 걸었다. 좌우의 차량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은 광장이 광장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못하게 억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광화문광장을 대표하고 있는 세종대왕상





광장에서 앞으로 걸어가면 맞은편 북악산 산자락 아래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경복궁이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서울엔 돌산이 많아 주위를 둘러보면 은근히 보는 맛이 좋다. 경복궁 내부는 다음으로 미루고 자전거를 창덕궁 방향으로 돌렸다.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많은 시민들이 수문장의 교대행사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다음으로 미룬 경복궁, 지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창덕궁과 종묘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인사동거리를 스쳐지나갔다. 풍문에 비하면 그렇게 우리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람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자본의 힘이 가만 놔두지 않고 침범하지 않았나 싶었다. 자전거를 되돌려 나오는데 정면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꼈지만 정말이지 낯설지 않아서 자세히 보니 방송연기자 김남주씨였다. 옆에 그의 딸로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서울을 찾은 첫날처럼 예전 같으면 이 어여쁜 연기자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크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김남주씨와 아이를 부드럽게 우회하여 천천히 스쳐지나가면서 어쩌면 이런 자잘할 일상들,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보던 사람을 우연찮게 길에서 마주친다거나 내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문화재를 마음만 먹으면 힘들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일이 사람들을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가을치고는 제법 더웠고 등엔 땀이 찼다.



서울견문록3 용산 전쟁기념관
자전거탄풍경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을 문득 만날 때 여행은 즐거워진다. 살짝 지루했던 교육기간중 모처럼 휴일을 맞아 시청방면으로 관광삼아 자전거를 저어 나갔다가 전쟁기념관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괜히 전쟁이라는 단어와 기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할 것이 없어서 피흘리며 싸운 전쟁 따위를 기념할 것까지야,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엔 그저 스쳐지나가는 길이었다. 잠수교 지나 용산 거쳐 시청 주변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를 둘러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문화재보다 용산 미군기지 좌우로 높이 자란 플라타너스가 나를 먼저 맞이해 주었다. 이런 풍경은 이곳 아니면 오히려 찾기 어려운 풍경이다. 웃자란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잘려나가기 십상인데 되려 미군기지 근처이기 때문에 이렇게 무사히 크고 높게 자란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맞이한 전쟁기념관의 첫인상은 크고 웅장함 그것이었다.



처음엔 정문이 아니고 옆문을 통해 입장하게 되었다. 입장료를 받는 곳이 아니다보니 특별한 안내가 없었던 탓이다. 기념관의 오른쪽 마당에는 이런저런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 것은 2002년 서해교전 당시의 고속정이었다. 피탄 흔적까지 그대로 복원해 놓은 함정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각국의 무기들이 어떤 것은 모형으로 혹은 실물 그대로 전시되고 있어 기념관을 찾은 아이들은 즐거워하였다. 나이 지긋한 노병들은 잠시 군대시절을 회상하는지 무기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곤 했다. 중간쯤 가니 현역시절 친숙했던 장비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나도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항공기 전시관의 대형수송기


국산전차는 물론이고 한국전쟁당시의 전차도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공방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미사일, 개인적으로 친숙한 무기체계다.




미그 19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걷는데 이웅평씨가 몰고 귀순한 미그-19가 보였다. 요즘은 민방위훈련의 강도가 예전같지 않지만 이웅평씨가 귀순할 때의 당시 상황은 참으로 가슴 오싹한 순간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흘러나왔던 아나운서의 다급했던 멘트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 지금은 실제상황입니다. 훈련상황이 아니고 실제상황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질서정연하게 가까운 건물지하나 지하철 그리고 대피소로…….


어린 나이에 당장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안절부절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가끔 지금도 이 일을 떠올리면 세상엔 이해하기 힘든 일 투성이라는 생각이다. 북한 최고 엘리트였던 그가 미그기를 타고 귀순한 것도 그렇고 귀순동기도 우습고 방공망이 쉽게 뚫린 것도 그렇고. 하긴, 얼마전엔 노크귀순도 있었으니.


어쨌든 그날의 일로 일순간 전국은 전시상황에 준하는 상태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민방위 훈련의 필요성이 입증된 날이기도 했다. 동네 슈퍼마켓의 라면이 동이 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고.


코브라헬기



전쟁기념관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던 나는 참수리호 모형을 보는 것으로 볼거리가 끝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자 비로소 나타나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관 건물과 기념 조형물이 시선에 들어오자 그 규모에 놀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마지막 어머니의 모습에서 전쟁의 비극이 단적으로 느껴진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 노병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평화를 깨려는 자들을 사전에 제거해야.


기념관 입구의 긴 회랑엔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관 내부는 외부에서 느껴지는 웅장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적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와 각종 병기들의 단순한 나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터라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신기하게 비춰지는 것들이 오히려 나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방학 때면 거의 반드시 숙제에 들어있던 반공서적 독후감을 수시로 써냈던 터라 해설사들의 해설내용마저 단조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사자명단이 설치되어 있는 회랑




기념관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거북선


전쟁영화에서 많이 봤던 따발총이 전시되어 있어서 눈길이 갔다.


삐라의 내용이 웃음을 자아냈다.


지금도 한국전쟁 당시의 유해 발굴작업이 진행중이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욱 폭넓게 진행되어야 한다. 구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더 많은 자료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없이는 앞으로도 같은 비극이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기념관이라는 명칭보다는 전쟁역사관이 적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정문을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소설가가 인용한 어린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어머니, 우리는 지금 중대라고 하지만 오십 명뿐입니다. 적의 대부대는 다시 이 고지를 빼앗으러 올 것입니다. 우리도 빼앗았으니까 적들도 빼앗겠지요. 우리는 지금 참호 속에서 거총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적들은 기척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풀 먹인 여름옷을 입고 싶어요.'  


-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158쪽



서울견문록2 남산
자전거탄풍경

베이비붐 세대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의 삶은 당연히 서울에서 이어질 것으로 여기며 컸다. 누이가 그랬고 멀게는 이모들이 서울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으니.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는 것으로 보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일생에 있어 서울이 빠진다면 뭔가 부족한 인생으로 여겨질 법도 했다. 그걸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3때 친구들과 허름한 자취방에 모여 우리는 이런 약속 따위를 하곤했다.


- 우리 서른살이 되면 서울 남산타워 아래에서 모이자. 무슨일이 있더라도 딱 서른이 되는 오늘 각자 성공한 모습으로 남산타워 아래에서 모이는 거다. 


우리들에게 서른이라는 나이는 몹시 먼 훗날의 일이었으며 그 나이쯤 되면 뭔가 대단한 성취를 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머리를 맞대고 엄지손가락에 뻘건 인주를 뭍혀 지장까지 꾹꾹 찍으며 맺은 약속은 흐지부지 되었다. 친구들과의 남산행은 더 일찍 이뤄졌다. 군대가기 전 서울여행 때 남산을 오르고 그 이후론 모두들 자기 살기 바빠서인지 어릴적 치기어린 약속 따윈 잊어버리고 산 거였다. 


자전거를 친구 삼아 오르는 남산도 썩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 주인이 바뀌어 버린 63빌딩


잠수교아래로 더 잘 정비된 자전거도로, 생뚱맞은 이름의 새빛둥둥섬도 보인다.



한강을 건너 국립극장 방면으로 꾸준히 이어지는 오르막을 오르니 점점 초록의 기운이 느껴졌다. 서울의 중심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릿한 대기가 거대한 도시 서울을 감싸고 있었다. 중간중간 나무난간으로 만든 전망대엔 휴일이라 전국팔도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 서울에 살면서도 여기 한 번 오기가 참 어렵네요. 언제 왔는지 기억도 안나네.

- 이 길이 무한도전 팀이 촬영을 한 곳이야.

- 저기! 건너편…… 우리집 있는 곳이다.


사람마다 사연도 제각각이었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등엔 땀이 났고 자전거를 한곳에 기대어 놓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릿한 하늘과 남산타워의 첨탑으로 시선을 돌리니 풍경 너머로 추억속의 친구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남산산책로 중간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서울시가지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한남대교, 서쪽으로 하루의 해가 지고 있다.

서울견문록1 여전했던 한강 자전거도로
자전거탄풍경

햇수를 헤아려보니 딱 9년만이었다. 내가 서울에 자전거를 끌고 다시 찾아온 것이……. 얼추 10년이니 강산이 한 번은 바뀌었을 법한 세월이다. 교육기관과의 상담을 마치고 숙소를 정한 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도로에 접어드니 마침내 서울에 당도하였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9년전 참 많이도 오갔던 길은 거짓말처럼 큰 변화가 없었다. 변화를 억지로 찾자면 보행자길이 추가가 되었다는 것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의 연령이나 성별 그리고 자전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영등포에서 여의도방향으로 달리는 한강자전거길, 멀리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갓 스무살이 되어 서울을 찾았을 때와 서른 언저리였을 때와 지금 눈으로 확인하는 서울은 많은 차이가 있다. 어릴적 눈에 비친 서울은 모든 것이 새롭고 거대하며 사람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내눈을 확 잡아끄는 것이 그다지 없다. 별 내용이 없는 사람이지만 식견이 들었나보다.


풍경이야 그럴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내면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맞은편의 강북, 서울특별시민이 아니어서 강남과의 차이를 모르겠다.


서울에 한강과 자전거도로가 없었더라면 끔찍한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폐기관과 모세혈관과도 흡사한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며 예전 기억을 떠올려본다. 변화, 변신을 모색하기 위해 9년전 새벽차를 탔던 내가 다시 이곳에 왔다. 그때와의 차이라면 설레임과 기대는 사라지고 무덤덤에 냉정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이번 짧은 서울생활을 마치고 나더라도 나에게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저 의례적인 수료증과 함께 내 이름 앞에 붙을 타이틀 하나가 늘어나는 정도일 것이다. 한강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희미했던 기대마저 더욱 억누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냥 일종의 선물. 나에게 주는 조금 비싼 선물이라고 치부하자. 남들은 해외여행도 다니지 않나…… 언젠가 이 나날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재미나고 신나게 지내보자.


나는 자전거의 방향을 돌려 한 평 남짓 숙소로 향했다. 페달을 밟는 발길이 무겁지 않았다.


도색이 눈길을 끄는 한강철교




맞은편에 보이는 남산타워


한강의 물억새, 가을이 절정이다.

간절곶 가는 길
자전거탄풍경


부산에 사는 사람의 호사는 마음만 먹으면 동해와 남해 그리고 높은 산, 길고 넓은 강을 지척에 두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다 똑같아 보이지만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남해의 바다는 호수를 닮은 바다이고 동해는 넙죽 엎어져 한바탕 목놓아 울기 좋은 바다이고 서해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몰래 선물을 슬쩍 던져주고 내빼버리는 친구와도 같은 바다다.


올해 들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러 바다를 접했다. 꿈속을 떠다니는 듯했던 제주의 바다도 좋았고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크게 안고 있던 남해의 바다도 좋았다. 목표는 되도록 많은 바다를 보고자 했으나 천성이 게으르다보니 동해와 서해는 차일피일 하게 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더는 못참아 줄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자전거에 기름을 치고 주섬주섬 가방을 꾸렸다.


구월의 햇살과 바람은 자전거 타기에 제격이었다. 폭염으로 기억될 올 여름이어서 가을이라는 계절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 해운대는 여전히 공사중: 갈 때마다 지형과 하늘의 선이 변하고 있다.


센텀고등학교: 고등학교 이름이 센텀고등학교다. 줄여서 센고.


한시간여 달려 당도한 해운대 해수욕장이 몹시 반가웠다. 아무래도 도심을 자전거로 관통하자면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은근히 힘이 든다. 답답하던 자동차의 물결을 벗어나 바다를 접하자 가슴 한켠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상쾌함도 잠시 백사장을 살펴보니 썩 개운치 않은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해운대 배후의 건물들은 하늘에 닿을 듯 높아만 가는데 해수욕장의 모래는 그 폭이 갈수록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십년전의 기억과 비교하면 해수욕장의 모래 규모가 초라해 보일 정도다.


백사장 없는 해수욕장이란 참으로 허전한 일이어서 시에서는 개장 전에 천평방미터 이상의 모래를 트럭에 싣고와 까는데 모래의 원산지는 한 때 전북 군산 어청도의 모래였다. 모래의 입장에서는 동서화합이 먼저 이뤄진 셈이다.


아마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공간에 대한 탐욕이 억제되지 않는한 개발과 보존은 같이 가기가 참 어려운 문제다. 멀리 오늘 넘어갈 달맞이 고개에도 더는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빌라와 카페가 한 가득이다.


해운대는 영화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준비가 한창인 해운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바라다보이는 고층빌딩 숲


해변의 다정한 연인들: 구월이지만 가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남성은 아시아계였고 여성은 금발의 러시아계여서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미포에서 바라다 본 해운대 해수욕장: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니 확실이 무분별한 개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늦게 출발한 탓에 시간은 어느덧 점심때였다. 해월정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 들어갔다. 만만찮은 가격대의 메뉴들이라 멈칫하고 있다가 그냥 나가기 뭐해서 주저앉았다. 옆 테이블을 살피니 다른 손님들이 식당의 주메뉴가 아닌 음식을 들고 있었다. 사람이 해가 갈수록 멍청해져 가는지 이 음식을 어떻게 부르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중국교포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 저기 저 손님들이 드시는 것이 뭐죠? 저걸로 주세요.

- 백반으로 드릴까요?


오호라, 이런 구성의 음식을 백반이라고 하는군. 나는 처음에 백반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런식의 갖춰진 음식을 먹어본지가 언제였던가. 독신은 수박 한 통을 사는 법이 없다.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형편이 그렇다보니 내 냉장고 속도 상해서 버릴 지경에 이른 식재료가 심심찮게 생겼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다보면 장을 보기가 쉽지 않다. 역시 한국사람은 이런 형태의 가정식 백반을 먹고 살아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다.


최근까지 재료가 좀 구체적인 음식들로 끼니를 떼우기 일쑤였다. 가령, 무슨무슨찌개나 무슨무슨탕 혹은 무슨무슨전골. 그러다보니 이 간단한 단어 백반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평범한 백반을 앞에 두고 별생각이 다 났다. 든든한 식사를 마치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솟았다. 나와 자전거는 31번 국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청사포 지나 기장쪽으로 가는 오르막길, 이날 유난히 하늘이 파랬다.


31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대변항에서 빠져나온 해안도로 




대변에서 죽성까지 한적한 바닷가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 길이 좀 짧은 것이 흠이다.




31번 국도 일광에서 월내까지는 비교적 바닷가와 인접한 길이라 실컷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 해송 사이로 멀리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보인다.


돌보지 않은 감나무에는 가을답게 가지가 휠 정도로 많은 열매가 달려있다.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건설현장 입구: 원전과 풍력발전기가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다. 풍력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대외홍보용으로 모양만 그럴 듯하게 만든 듯 보였다.


31번 국도는 말이 국도지 부산에서 울산의 공업단지까지 이어지는 도로여서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해서 나는 틈만 나면 해안도로로 빠져들었다. 서생면을 조금 지나니 오른쪽으로 나사리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나왔다. 핸들을 꺾어 천천히 마을로 접어드니 파도소리, 바람소리, 갈매기 우는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나사리의 아름다운 바다: 맞은편 등대를 지나 길은 간절곶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이런 형태의 벽화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밋밋한 시멘트 담벼락보다는 확실히 보기에 낫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정된 예산 때문인지 벽화의 내용과 재료가 천편일률적이지는 않나 하는 점이다. 


땀을 식히며 한참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도 마을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벽화 구경을 하며 걷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벽화가 있었다. 불을 쬐고 있는 해녀 할머니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얼굴표정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잘 살아나 있었다. 인자하지만 고집이 세 보이는 할머니, 어떤 말을 건네도 웃으며 잘 받아줄 것 같은 할머니, 장난끼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은 채 농담도 곧잘 할 것 같은 할머니.


나사리, 한 번 살아보고픈 마을이다. 자전거에 다시 올라 천천히 해안도로를 달려나가는데 지금까지 달려온 길 중에서 가장 좋은 경치를 던져준 곳이었다.




나사리에서 간절곶으로 가는 길가




목재난간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가 장관이다. 주변에 커피전문점이 많고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간절곶에 도착하면 바다경치도 경치지만 늘 여행자를 먼저 맞이하는 것은 대형 우체통과 이런저런 조형물들이다. 간절곶이 처음은 아닌데도 이곳에만 오면 괜히 마음이 간절해지는 연유를 모르겠다. 동해안 일출을 빨리 볼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런 것일까? 잠잠하던 바다가 어느새 바람이 거칠어졌다. 나들이 나온 아가씨들은 치마단을 붙잡기에 바빴고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수평선에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보니 정작 간절곶에서 일출 구경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잘익은 홍시 같은 불덩어리가 떠오르는 모습을 접하면 가슴속 실낱 같이 미미해져버린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날까?


우체통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바쁜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음속의 작은 소망 한가지를 적어 마음으로 우체통에 투척한 후 다시 길 위에 올랐다. 해가 지기 전에 울산까지 가야 했다.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갔고 먼 데 온산과 울산에서 풍기는 중공업의 냄새가 여행자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간절곶


                            ▲ 간절곶 소망우체통


화학공업회사가 많은 탓에 냄새에 적응이 쉽지 않았던 울산




울산의 랜드마크 공업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