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곶 가는 길
자전거탄풍경


부산에 사는 사람의 호사는 마음만 먹으면 동해와 남해 그리고 높은 산, 길고 넓은 강을 지척에 두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다 똑같아 보이지만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남해의 바다는 호수를 닮은 바다이고 동해는 넙죽 엎어져 한바탕 목놓아 울기 좋은 바다이고 서해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몰래 선물을 슬쩍 던져주고 내빼버리는 친구와도 같은 바다다.


올해 들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러 바다를 접했다. 꿈속을 떠다니는 듯했던 제주의 바다도 좋았고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크게 안고 있던 남해의 바다도 좋았다. 목표는 되도록 많은 바다를 보고자 했으나 천성이 게으르다보니 동해와 서해는 차일피일 하게 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더는 못참아 줄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자전거에 기름을 치고 주섬주섬 가방을 꾸렸다.


구월의 햇살과 바람은 자전거 타기에 제격이었다. 폭염으로 기억될 올 여름이어서 가을이라는 계절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 해운대는 여전히 공사중: 갈 때마다 지형과 하늘의 선이 변하고 있다.


센텀고등학교: 고등학교 이름이 센텀고등학교다. 줄여서 센고.


한시간여 달려 당도한 해운대 해수욕장이 몹시 반가웠다. 아무래도 도심을 자전거로 관통하자면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은근히 힘이 든다. 답답하던 자동차의 물결을 벗어나 바다를 접하자 가슴 한켠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상쾌함도 잠시 백사장을 살펴보니 썩 개운치 않은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해운대 배후의 건물들은 하늘에 닿을 듯 높아만 가는데 해수욕장의 모래는 그 폭이 갈수록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십년전의 기억과 비교하면 해수욕장의 모래 규모가 초라해 보일 정도다.


백사장 없는 해수욕장이란 참으로 허전한 일이어서 시에서는 개장 전에 천평방미터 이상의 모래를 트럭에 싣고와 까는데 모래의 원산지는 한 때 전북 군산 어청도의 모래였다. 모래의 입장에서는 동서화합이 먼저 이뤄진 셈이다.


아마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공간에 대한 탐욕이 억제되지 않는한 개발과 보존은 같이 가기가 참 어려운 문제다. 멀리 오늘 넘어갈 달맞이 고개에도 더는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빌라와 카페가 한 가득이다.


해운대는 영화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준비가 한창인 해운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바라다보이는 고층빌딩 숲


해변의 다정한 연인들: 구월이지만 가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남성은 아시아계였고 여성은 금발의 러시아계여서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미포에서 바라다 본 해운대 해수욕장: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니 확실이 무분별한 개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늦게 출발한 탓에 시간은 어느덧 점심때였다. 해월정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 들어갔다. 만만찮은 가격대의 메뉴들이라 멈칫하고 있다가 그냥 나가기 뭐해서 주저앉았다. 옆 테이블을 살피니 다른 손님들이 식당의 주메뉴가 아닌 음식을 들고 있었다. 사람이 해가 갈수록 멍청해져 가는지 이 음식을 어떻게 부르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중국교포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 저기 저 손님들이 드시는 것이 뭐죠? 저걸로 주세요.

- 백반으로 드릴까요?


오호라, 이런 구성의 음식을 백반이라고 하는군. 나는 처음에 백반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런식의 갖춰진 음식을 먹어본지가 언제였던가. 독신은 수박 한 통을 사는 법이 없다.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형편이 그렇다보니 내 냉장고 속도 상해서 버릴 지경에 이른 식재료가 심심찮게 생겼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다보면 장을 보기가 쉽지 않다. 역시 한국사람은 이런 형태의 가정식 백반을 먹고 살아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다.


최근까지 재료가 좀 구체적인 음식들로 끼니를 떼우기 일쑤였다. 가령, 무슨무슨찌개나 무슨무슨탕 혹은 무슨무슨전골. 그러다보니 이 간단한 단어 백반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평범한 백반을 앞에 두고 별생각이 다 났다. 든든한 식사를 마치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솟았다. 나와 자전거는 31번 국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청사포 지나 기장쪽으로 가는 오르막길, 이날 유난히 하늘이 파랬다.


31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대변항에서 빠져나온 해안도로 




대변에서 죽성까지 한적한 바닷가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 길이 좀 짧은 것이 흠이다.




31번 국도 일광에서 월내까지는 비교적 바닷가와 인접한 길이라 실컷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 해송 사이로 멀리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보인다.


돌보지 않은 감나무에는 가을답게 가지가 휠 정도로 많은 열매가 달려있다.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건설현장 입구: 원전과 풍력발전기가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다. 풍력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대외홍보용으로 모양만 그럴 듯하게 만든 듯 보였다.


31번 국도는 말이 국도지 부산에서 울산의 공업단지까지 이어지는 도로여서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해서 나는 틈만 나면 해안도로로 빠져들었다. 서생면을 조금 지나니 오른쪽으로 나사리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나왔다. 핸들을 꺾어 천천히 마을로 접어드니 파도소리, 바람소리, 갈매기 우는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나사리의 아름다운 바다: 맞은편 등대를 지나 길은 간절곶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이런 형태의 벽화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밋밋한 시멘트 담벼락보다는 확실히 보기에 낫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정된 예산 때문인지 벽화의 내용과 재료가 천편일률적이지는 않나 하는 점이다. 


땀을 식히며 한참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도 마을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벽화 구경을 하며 걷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벽화가 있었다. 불을 쬐고 있는 해녀 할머니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얼굴표정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잘 살아나 있었다. 인자하지만 고집이 세 보이는 할머니, 어떤 말을 건네도 웃으며 잘 받아줄 것 같은 할머니, 장난끼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은 채 농담도 곧잘 할 것 같은 할머니.


나사리, 한 번 살아보고픈 마을이다. 자전거에 다시 올라 천천히 해안도로를 달려나가는데 지금까지 달려온 길 중에서 가장 좋은 경치를 던져준 곳이었다.




나사리에서 간절곶으로 가는 길가




목재난간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가 장관이다. 주변에 커피전문점이 많고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간절곶에 도착하면 바다경치도 경치지만 늘 여행자를 먼저 맞이하는 것은 대형 우체통과 이런저런 조형물들이다. 간절곶이 처음은 아닌데도 이곳에만 오면 괜히 마음이 간절해지는 연유를 모르겠다. 동해안 일출을 빨리 볼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런 것일까? 잠잠하던 바다가 어느새 바람이 거칠어졌다. 나들이 나온 아가씨들은 치마단을 붙잡기에 바빴고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수평선에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보니 정작 간절곶에서 일출 구경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잘익은 홍시 같은 불덩어리가 떠오르는 모습을 접하면 가슴속 실낱 같이 미미해져버린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날까?


우체통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바쁜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음속의 작은 소망 한가지를 적어 마음으로 우체통에 투척한 후 다시 길 위에 올랐다. 해가 지기 전에 울산까지 가야 했다.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갔고 먼 데 온산과 울산에서 풍기는 중공업의 냄새가 여행자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간절곶


                            ▲ 간절곶 소망우체통


화학공업회사가 많은 탓에 냄새에 적응이 쉽지 않았던 울산




울산의 랜드마크 공업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