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견문록6 낙선재
자전거탄풍경

하마터면 창덕궁 구경이 후원과 창경궁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끝날 뻔했다. 후원은 관람객들로 이미 예약이 만료된 상태여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그 아쉬움을 미리 대비라도 한 것처럼 낙선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우리 궁궐에 낙선재와 같은 공간이 없었더라면 그 멋이 덜했을 것 같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전각도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생활의 냄새가 덜한 공간이다보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수가 없다. 선뜻 다가서기 좋은 공간은 오히려 낙선재와 같은 곳이다. 댓돌에 발을 올리고 툇마루에 앉으면 앉은키에 높이가 딱맞아 몸이 편안했고 시선을 위로 올리니 네모난 하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우리 한옥의 멋을 살린 건축물이다보니 시선이 가는 곳은 어디라도 예사로 보이지 않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에 건물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일은 몹시 신산한 곳이 낙선재이다.



고종과 순종이 이곳에 기거한 것은 물론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친족들이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채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황태자이자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삶 자체가 왜곡으로 강제되었던 영친왕 이은과 황태자비인 이방자, 일본명 나시모토 마사코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도 마찬가지.


조선왕조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자기나라 일왕은 그렇게 떠받들기 바쁜 자들이 조선왕조와 그 일가에 가한 위해는 글로 다 옮기지 못할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낙선재는 그들의 일을 빠짐없이 목도하였을 터인데 2012년 가을엔 그 어떠한 기미도 없이 주변이 한가롭기만 하였다.


자전거의 핸들을 종묘로 꺾었다.


낙선재의 색은 강렬하지 않고 연한 파스텔톤이어서 일반적인 궁궐과 구분된다.




툇마루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애기나인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