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견문록7 종묘
자전거탄풍경

만약 종묘를 이십대 시절에 들렀더라면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어릴적에는 입에도 못대던 음식의 깊은 맛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창덕궁에서 큰 길을 하나 건너니 종묘가 지척에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면서 종묘 역시 관람객의 출입이 일정수준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관람객 숫자 이내에서 문화해설사의 인솔에 따라야만 관람이 가능했다.


이를 두고 관람객과 시설관리를 맡고 있는 측에서 심심찮게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내돈 내고 내가 보는데 무슨 해설 따위가 필요하냐. 이러쿵 저러쿵. 그도 그럴것이 시간을 잘못맞추면 한시간 이상을 바깥에서 기다려야 하니 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표도 예매한 시간에 정확하게 들어가야 하는 세상이다. 


나의 경우도 이런 규칙이 처음엔 낯설어서 잠시 망설였다. 앞의 차례는 이미 정원이 차버렸고 다음은 외국인이 출입하는 순서여서 한시간 반 이상을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발길을 되돌리려 하다가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다시 오겠나 싶어서 기다리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님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따라서 왕조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례가 행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죽은이들을 기리는 곳 근처의 종묘공원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괜히 기분이 묘해지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내 성격이 이렇게 여럿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낯선이들과 섞인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못견뎌 하는 터라 그랬을 것이다.


공원의 어르신들은 대선후보에게 쌍욕을 하기도 하였고 거의 대부분은 장기와 바둑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몇몇은 삼삼오오 모여서 한시를 적은 후 크게 읽으며 뜻을 풀이하기도 하였다.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일로 소일하고 있을지가 사뭇 궁금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사고하는 능력과 지식을 흡수하는 방식에서 만큼은 좀 유연한 상태로 늙었으면 하고 나는 바랐다.


서울에서 잔술값과 이발비가 가장 저렴한 곳이 종묘공원 이곳 아닐까, 싶었다.


깊이는 느낄 수 없지만 나름 멋을 부린 글씨들, 종묘공원 어르신들의 길바닥 작품이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로 입장을 하자 문화해설사의 자기소개와 종묘에 관한 역사해설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다들 투덜투덜에 심드렁하게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점점 해설의 깊이가 깊어지자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귀를 쫑긋하고 집중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런저런 질문까지 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자, 이러니 해설 없이 종묘를 한 번 쓱 훑고 나오는 일은 관람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다. 종묘가 처음인 사람이라면 되도록 자유관람이 허용되는 토요일보다 다른 날을 잡아 해설을 들으며 관람하는 것이 더욱 뜻깊은 일일 것이다.




좌우로 임금님과 세자가 걷고 가운데는 돌아가신 역대 임금님이 신의 위치가 되어 걷는 길이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종묘의 건축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되도록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삼가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조상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치장이 의미가 없고 되려 잡스럽게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되도록 엄숙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물은 물론 연못이나 박석에도 별다른 꾸밈이 없는 것이 다른 궁궐건축과의 차이라고 했다. 동시에 다른 궁궐 건물의 입구마다 있는 현판도 없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신을 위한 공간이므로 일체의 언어마저 의미가 없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은 사람들이 길을 잊어먹지 않게 하거나 제대로 위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슨문, 무슨각, 하고 이름을 써서 붙이는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신의 영역에서는 이 조차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듣고보니 모든 건물엔 일체의 글씨가 없었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제례에 쓰일 음식을 만들던 공간, 전사청



정전에 들어서니 그제서야 단체관람이 아니었다면 약간 색다른 느낌의 종묘를 느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건축물이 이렇게 간단명료할 수도 있다니, 하는 놀라움도 들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해설사의 설명이 귀에 잘 안들어왔던 것 같다.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셔터를 누르기 바빴는데 지금 확인하니 실제 종묘의 분위기가 제대로 반영된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너른 마당 앞에서 악사들이 종묘제례악을 연주하고 있고 임금님이 엎드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유교라는 새 방식의 건국이념을 이보다 더 강하게 뭇백성들에게 어필하는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방식이야 조선왕조 이전에도 어찌 없었겠나, 그러나 이를 새롭게 제도화하고 형식화하여 국가의 근간인 이념적인 틀로 만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금님이 당신의 부모와 할아버지를 정성으로 받드는 것과 같이 백성들이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 줄 것을 새 왕조의 임금님은 바랐을 것이다.


왕조의 바람은 결국 영원할 수 없었고 종묘만 남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오늘날에도 매년 제례는 벌어지고 있는데 임금님을 대신하여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추천한 일인과 역대 왕후를 배출한 집안에서 추천한 여성 일인이 절을 올린다고 한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예전 법도에는 여성은 제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변화를 뛰어넘는 것은 왕조는 물론이고 유교나 유교전통을 바라보는 우리 의식의 변화일 것이다. 문득 사람의 일이 작고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과 변화의 흐름속에서 사람은 잊혀지기 쉬운 것이겠지…….


종묘를 빠져나오며 다시 한 번 정전쪽을 돌아보았다. 요즘 괜히 뒤돌아보는 일이 잦다. 


나이 탓인가 보다.


왕의 신주를 모신 곳이라 규모가 크다.


정형화되지 않은 박석의 배치가 오히려 눈이 덜 피곤했다.










오년상이 끝나면 위패가 이 길을 따라 올라 종묘에 자리를 잡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