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일상다반사

어른들은 저 나이가 되면 무섭지도 않나?


한참 어릴 때 윗풍 센 방안 윗목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10대가요제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고기냄새 배인 코트를 벗어 어머니에게 건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여차하면 손목이 헤지고 무릎 나온 내복 바람으로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판이기 때문이었다. 술이 모자랐는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술상을 따로 차리게 하여 젓가락 장단까지 곁들이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아버지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당시엔 평균수명이 60대였으므로 아버지는 명백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적어보였다. 어린 녀석이 별생각을 다하고 살았는데, 나는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면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 살아가나 싶었다. 아버지는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저렇게 술을 많이 드시나? 가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올 해의 마지막 날 31일이다.


꼽아보니 내가 그 때 그 날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 따위가 두렵지 않다. 지레짐작으로 아주 두려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더디 갔으면 하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이로 따지자면 몸은 이제 더 나빠질 일만 남은 셈이다. 다만 그점이 유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몸에 병이 생겨 모르는 이들에게 원하지 않는 신세를 지지나 않을까, 그게 오히려 두렵다.


새해부턴 몸이라도 제대로 건사해야겠다. 불끈!


31일. 차고도 메마른 겨울바람이 분다. 바람의 형편이 그러하니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덩달아 건조해진다. 영혼마저 바싹 말라 누가 툭 건드리면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겨울의 대기속으로 흩어질 것만 같은 날이다.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