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갈기, 유목, 흘러간다.
카테고리 없음

줄갈기.


아마 나 말고 다른 누군가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기타라는 악기의 줄은 어느 순간 아무리 조율을 해도 제 음을 내지 못하는 때가 있다고. 겉은 멀쩡해도 이미 수명을 다했다는 이야기다. 기타를 잘 다루는 사람은 기타줄을 잘 끊어먹지 않는다. 그러나 기타를 더 잘치는 훌륭한 연주가는 기타줄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기다지지 않고 수시로 새줄로 갈아버리는 법이다. 그래야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나는 훌륭한 연주가는 못되어서 그저 줄을 끊어먹지 않고 오래 사용할 줄 아는 정도의 사람이다. 줄의 수명이 다했는지도 뒤늦게야 깨닫는 심히 아둔한 수준의 그저 그런.


줄의 수명이 다했을 땐 과감하게 줄갈기를 해야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더는 효용이 없는 방식을 미련만 남아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목.


낡고 오래된 기타줄과 흡사한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해 이맘때쯤이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안에 유목민의 기질이 없음을 한탄하며 지냈던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를 손에 쥐고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를 고민하는 사이 여름이 왔고, 가을을 살았고, 겨울속에 움추려 지냈다.


그 옛날 유목민의 느린 걸음으로도 이정도 기간이면 사막을 횡단했을 시간이다. 물론 멍하니 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스스로가 가장 행복한지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내가 좋아하는 일의 새로운 기술도 접하였다. 다만 오랜시간 정착에 익숙한 농경민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오다보니 짐을 꾸리고 낯선곳으로 길을 나서는 변화에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생겼다고나 할까. 


유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헛웃음 나오는 꼬락서니일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홀홀단신이었던 칠년전에 비해 너무나 많은 짐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노새도 나귀도 없이 사막을 횡단하기가 그래서 두려웠을까?



흘러간다.


남들 며칠이면 뚝딱 해버릴 결심을 하는 데에 일년이 걸렸다. 남들 하루만에 뚝딱 하고 싸버릴 짐을 분류하고 꾸리는 데에 일주일이 걸렸다. 너무도 느리고 요령없는 나지만, 이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련다. 이게 바로 변할 수 없는 나니까. 


자, 이제 흘러갈 일만 남았다. 내일이 선명하진 않지만 앞으론 너무 많은 선택지를 놓고 고민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꿈이라는 것이 있었을 때도 내 안의 고민은 지금과 마찬가지의 무게로 무거웠다. 빨리 꿈을 이루지 못해 가슴을 졸이는 일도 있지 않았나. 걱정일랑 떨쳐버리자! 파랗고 넉넉한 목초지를 따라 나도 그들처럼 씩씩하고 유쾌하게 흘러가보자.


씩씩하고 유쾌하게…….